[문화다양성 무지개다리] ⑦ 장애인 그룹홈20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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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그룹홈을 운영 중인 김화순 씨 부부와 그가 우리 아들이라고 부르는 김호연·김배린 씨와 딸 연주 씨(앞줄 가운데), 김 씨는 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들에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장애인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라
김화순 씨 발달장애 딸 계기로
교육과 시설의 필요성 느껴 시작
“장애인은 특히 정서적 안정 중요”
용진읍 효천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정원이 있는 2층 집이 하나 나온다. 김화순(66)씨가 운영하는 장애인그룹홈이다. 김 씨가 이곳을 운영한지 10여 년째. 현재 김 씨의 부부와 3명의 발달장애인이 함께 생활한다.
□ 장애 딸을 둔 부모로서의 시작
김 씨가 장애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딸 유연주(42)씨 때문이었다. 김 씨 역시 발달장애가 있는 딸을 둔 부모였기 때문이다. 발달장애는 선천적으로 또는 발육 과정 중 생긴 대뇌 손상으로 인해 지능 및 운동 발달 장애, 언어 발달 장애, 시각, 청각 등의 특수 감각 기능 장애, 기타 학습장애 등이 발생한 상태를 의미한다. 김 씨가 딸을 포함해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과 시설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였다. 엄마였던 김 씨가 움직였던 이유.
“40여 년 전에는 장애인이란 타이틀도 흔하지 않았어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나 의료기관도 마땅하지 않았죠. 장애아를 가진 부모들이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너무나 필요했죠.”
장애가 있는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렇게 생긴 곳이 김 씨가 1986년에 설립한 전북장애인부모회이다. 별도의 공간도 없었기에 열여덟 평정도 되는 그의 집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해 김 씨는 두 명의 특수교사와 함께 장애인에게 필요한 재활치료 등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우리 지역에 처음으로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생긴 거였죠. 우리 아이들은 언어치료, 작업치료, 재활치료가 필요해요. 당시에 전주에 있는 병원 한 곳에서 치료가 가능했는데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비쌌죠. 그래서 저희 집에서 특수교사 두 명과 함께 시작한 거였어요.”
치료를 담당했던 특수교사들도 큰돈을 바라지 않았다. 당시 한 달에 그들에게 십만 원씩 줬으니 적은 돈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명감으로 아이들을 함께 돌봐준 것이다.
“모두 신앙을 가진 순수한 마음으로 동참해주셨죠. 제가 안방 드나들 듯 시청이나 도청을 쫓아다녔어요.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러던 중 도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줘서 전북장애인부모회의 공간이 처음으로 생길 수 있었죠.”
2003년에는 김 씨의 집에서 그룹홈을 시작했다. 6~7명의 발달장애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지만 아파트라는 공간적 제약을 느껴 현재의 위치로 이사했고 벌써 10년이 흘렀다. 현재는 딸 연주 씨를 포함해 모두 3명의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한다.
“무조건 도시보다는 시골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우연히 이곳으로 오게 됐어요. 지금은 집 앞에 작은 마당이라도 있어서인지 아이들이 집에서 뛰지도 않아요. 오길 잘했죠.”
□ 같은 장애를 가진 이들이 서로 울타리가 되어
이들의 그룹홈은 일반 가정집과 같은 생활을 하며, 교육 등은 각 기관에서 해결한다. 이집에서 김 씨 부부를 제외하고 딸 연주 씨가 가장 나이가 많은 첫째이고, 그다음이 김호연(29)씨와 김배린(29)씨이다. 막내는 최근 시설로 들어갔고 최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호연 씨는 강원도 고성에 있는 시설에서 생활하던 중 이곳에 왔다. 평소 관심을 못 받으면 스스로를 깨물며 자해를 했고, 음식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이곳에 오면서 많이 달라졌다. 배린 씨는 이곳에 온지 20년째다. 자영업자인 부모 모두 일 때문에 바빠 호연 씨에게 온전히 신경을 쓸 수 없었고 9세 되던 해 김 씨의 그룹홈에 왔다.
김 씨는 이들을 ‘우리 아들’이라고 부른다. 내 자식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내 자식, 네 자식이라는 경계가 불분명하다.
“제 딸을 키우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모르는 게 많았거든요. 하지만 단체를 운영하고 부모 교육을 받다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생기더라고요. 이제는 아이들 눈만 봐도 알아요. 아이들은 스트레스에 취약해요. 이곳에 와서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 자해를 하는 경우도 줄어들었어요.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저희 딸만 해도 혼자 있는 것보다 동생들과 있으면서 역할이 주어지니 더 좋아졌어요.”
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들의 마음은 비슷하다. 나 때문에 우리 아이가 힘들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편견과 그들의 시선도 장애 가족이 이겨야할 큰 난관이다.
“식당을 간다거나 심지어 종교시설을 가도 노골적으로 아이들을 문전박대하는 곳이 있어요. 지금은 이골이 나서 그냥 살지만 그래도 그 상처들은 마음에 남아있죠.”
그는 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들에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 역시 자신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딸에게 상처를 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특수학교가 있잖아요. 저도 처음에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우리 딸을 일반학교에 보냈어요. 그러다보니 딸에게 성격장애가 생기더라고요. 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이 장애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걸 힘들어해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들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김 씨에겐 자녀들이 많다. 배 아파서 낳은 연주 씨만이 자식이 아니다. 그 자식들을 품기 위해 김 씨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간다.
“우리나라처럼 특수교육이 잘 된 곳도 없어요. 늘 감사하죠.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 개선에 대해서는 아직 노력이 필요해요. 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들이 모두 사회에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늘푸름그룹홈_문의 010-4177-2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