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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6.09.16

고산면 원산마을 김금자 이야기

내 삶의 자리가 전부 기도 자리지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6.09.16 11:00 조회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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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사는 마을 길은 유난히 좁고 고불고불해서 맞은 편에서 오는 차를 만날 때면 서로 비켜주느라 진땀이 나곤 한다. 친구를 데려다주는 핑계로 자주 드나들긴 하지만 사실은 내 어린 시절 잠시 살았던 마을 길과 닮아서 그 길을 지나는 것이 좋다.

금자할머니 방 한쪽의 기도하는 곳.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매일 기도를 드린다.
금자할머니 방 한쪽의 기도하는 곳.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매일 기도를 드린다.

내가 살던 마을 길은 얼마나 좁았던지 자동차 피하려다가 논에 빠져 온몸이 흙탕물 범벅이 되어 울며불며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밭과 논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맞닿은 좁은 길. 불편한 길이지만, 경계가 모호한 만큼 삶의 자리가 유난히 잘 보인다.

친구의 마을 길을 지날 때면 늘 한 분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땅 가까이 몸을 낮추고 밭일을 하시는 모습이었다. 작은 체구에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밭장화를 신은 채 묵묵히 땅을 일구고 계셨다. 몸집은 작았지만, 밭 한가운데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컸다.

낮은 자세로 땅을 일구는 할머니 곁을 자동차로 휙 지나치는 일이 괜스레 미안해 나는 창문을 슬며시 닫곤 했다. 늘 밭에 계시던 할머니가 가끔 보이지 않는 날이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됐고, 며칠 뒤 다시 밭에서 일하고 계신 모습을 발견하면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더 늦기 전에 이야기를 건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달리던 차를 세우고 내려 할머니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김금자(1940년생 87세) 할머니의 마당에 앉아 추석 보낸 뒤에 밭에 심을 마늘을 쪼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이 마을을 드나들며 밭일하는 금자 할머니의 모습을 눈에 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십 년이 되어간다.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보아온 지난 십 년보다 더 젊었던 시절, 할머니의 노동은 얼마나 고되고 치열했을까.

“애들 아버지가 술만 안 마시면 참 순하고 좋았지. 애들을 얼마나 잘 보는가 울리는 일이 없었어. 대신 내가 바작지고 험한 일을 많이 했어. 내가 싸남을 피워야 살 수 있었어. 우리 수녀님은 나를 호랑이 엄마로 기억하고 동네사람들은 나를 부지런쟁이라고 부르지. 나는 여전히 밭에서 일하는 것이 재밌어.

우리 신부님이 일 그만하고 양로당에서 놀으랴. 그럼 내가 이런 소리를 혀. 땅이랑 있으면 죄를 안 짓는데 사람들이랑 있다 보면 죄짓게 되어 있다고. 그럼 신부님이 무리만 하지 말라고 하시지. 나는 이때껏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 감사혀.”

김금자 할머니는 오남매 중 첫째와 둘째가 신부님과 수녀님의 길을 걷도록 했다. 엄하게 키워낸 자식들이지만, 이제는 사제와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에게 꼬박꼬박 ‘하오체’를 쓴다.

>> 억척스럽고 부지런했던 호랑이엄마 금자 할머니는 비봉면에서 태어나 스물두 살에 걸어서 어우리 분토골 인동장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산 너머 남의 재실에서 시작한 시댁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기도하는 김금자 할머니
기도하는 김금자 할머니

“내 고향은 비봉 천호성지. 우리 친정은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야. 나 큰애기 때도 주일날 공소일이 끝나면 치명자산까지 참배 갔다 왔어. 우리 엄니가 밥 안 차린다고 늦게 온다고 뭐라고 했지. 시골 살면서 어려서 이날 이때까지 평생 농사만 지었어. 학교도 못 갔어. 그때는 이상하게 학교 가기 싫더라고. 시집와서도 편하게 살기 힘들겠더라고. 배운 것이 농사일이니 남의 집 농사일하며 품삯 받아 힘들게 살았지.”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 더 가난한 아이에게 달걀을 가져다주던 첫째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신부님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금자 할머니는 망설이지 않고 아들의 뜻을 지지했다.

“우리 집 영감이 지게를 내던지고 와서는 큰일 났디야. 왜그랴? 그랬더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대 끊기려고 신학교에 가서 신부가 된다고 하니 어떡해, 그러기에 당신 눈 뜨고 죽어? 다 눈 감고 죽으면 끝나. 아들 하나가 죽을 때 기도해주는게 좋지.

아들 열이 있어도 기도 안 해주면 소용없다, 그 이야기를 듣더니 가만히 있더라고. 그런데 막상 내가 덜컥 겁이 나드만. 국문도 모르는데 신부 애미가 되었으니 난리가 나잖아. 그래서 구약성경 두꺼운 책을 3번째 읽었어. 글을 영 모르는 건 아니었거든. 바닥에 더듬더듬 쓰기는 했었지.

처음에는 몇 자도 못 읽다가 지금 두꺼운 책을 세 번을 읽었더니 이제 달달달 읽어. 이상하게 다른 책은 눈에 안 들어오는데 성경책은 자꾸 읽고 자퍼. 지금 네 번째 읽고 있어.”

아들이 신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할머니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까지 기도를 드린다.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기 위해 할머니의 집 곳곳에는 묵주가 놓여 있다. 거실 책상 위에도, 마당 평상 위에도, 일을 하는 자리에도 묵주가 놓여 있다. 할머니에게는 삶의 자리가 곧 기도의 자리다.

남편이 속을 썩일 때는 산에 올라가서 한참 동안 묵주기도를 드렸다. 아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적에는 저녁을 먹고 폭폭한 마음을 달래려고 마을 길을 걸으며 묵주기도를 하면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고 한다.

앉아 있는 곳곳 마다 목주가 놓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기도를 드린다 (1)
앉아 있는 곳곳 마다 목주가 놓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기도를 드린다 (1)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병간호를 했고, 지금의 집에서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드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가슴 깊이 맺혀 있던 응어리들이 하나둘 풀리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한다. 일요일 고산성당 미사 시간이 10시인데, 금자 할머니는 늘 한 시간 일찍 가서 앉아 있는다.

고요한 성당 안에 앉아 하나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참 좋기만 하다.

“나는 지금이 천국이야.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 없고, 자식들 덕분에 대우받고 살고. 나 같은 사람이 대우받고 산다니 나는 기적 같아. 딸 많은 집에 셋째 딸로 태어났으니 엄청 구박받고 살았는데, 이렇게 사니 얼마나 천당이야. 요즘 내 얼굴을 보고 누가 그러더라고. 예전이랑 달라졌데.

얼굴에 주름살도 없고 웃는 상이 되었디야. 내가 전에는 싸나움만 부리고 살았으니 표정이 무서웠겠지. 지금은 보는 사람마다 나보고 복스럽다고 그려. 한 집안에서 수녀님, 신부님이 나오는 게 참 영광스럽지. 그래서 이게 천당이야.”

김금자 할머니의 평생은 땅과 가까이, 늘 낮은 자세로 농사를 짓고 기도하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평생 자신을 위해 기도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조금씩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부지. 내가 죽드럭까지 귀먹지 않고 치매 걸리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다가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추석 지나 밭에 심을 마늘과 쪽파를 손보고 있는 김금자 어르신
추석 지나 밭에 심을 마늘과 쪽파를 손보고 있는 김금자 어르신

현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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