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6.07.13

비봉면 염암마을 남전자 할머니 이야기

여든이 지나서야 꽃을 피웠네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6.07.13 10:09 조회 12 댓글 0
목록으로 돌아가기

비봉면 염암마을 끄트머리에는 몇 해 전 전주에서 이주해 와 나무집을 짓고 살아가는 지인이 있다. 이 지인 덕분에 나는 행정명인 염암마을보다 ‘소금바우’라는 옛 이름이 더 익숙하고 정겹다. 실제로 마을 뒷산에 ‘소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어, 마을 어르신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을 소금바우라고 불러왔다.

이른 아침에 봐야 꽃들이 예쁘더만
이른 아침에 봐야 꽃들이 예쁘더만

새로 터를 잡은 지인도 이 옛 이름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소금바우 초입, 흰 울타리가 둘러쳐진 집이 남전자(88) 할머니의 집이다. 할머니의 앞마당에는 계절마다 소박한 꽃들이 피어나는데, 길을 오가던 이들이 이 꽃을 보느라 발걸음이 느려지곤 한다.

꽃을 좋아하는 끄트머리 나무집 지인은 종종 할머니의 마당에서 꽃구경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마당에서 캐어 낸 꽃모종을 꼭 그의 손에 들려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 끄트머리집은 또 자신이 키우던 꽃을 들고 가 할머니의 마당 한편에 지긋이 놓아두었다.

마을의 시작점과 끝자락에 사는 이들이 서로의 마당에 심은 꽃을 주고받는 셈이다. 이 귀여운 거래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동행하기로 했다.

■ 내 몸뚱이 하나로 산 거야

둘째 아이 돌잔치를 이 집에서 했다고 하니 꼬박 한 터에서 60년을 살았다. 함께 사는 아들의 수고로움으로 15년 전에 낡은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었다. 집을 두르고 있던 높은 담을 허물자 온 빛이 마당에 들어왔다. 혼자만 보는 꽃이 아니라 길을 오가는 온갖 존재들을 위해 꽃을 피우는 남전자 할머니. 여든이 지나서야 꽃을 피운 삶의 이야기다.

“나 고생한 거 말도 못혀. 동네 사람이 다 알지.”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 웃음이 너무 맑아 고생스러웠던 세월이 선뜻 떠오르지 않다가도, 투박하게 마디가 굵어진 손과 잔뜩 굽은 허리를 마주할 때면 그제야 지나온 시절이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용진읍 지동리 6남매 중 귀한 딸로 태어나 큰 애기 될 때까지 금이야 옥이야 커서 나부대기만 했지, 일이라는 건 해본 적이 없었다. 24살 동짓날에 어우리로 시집와 25살에 첫 아기를 낳았다. 그 뒤로 두세살 터울로 육남매를 낳았고 자식들 살리기 위해 오로지 할머니 혼자 몸으로 돈을 벌었다.

“애들 아버지는 참 모진 사람이었지. 그래도 어쩌겄어, 결국 내가 선택한 삶이지. 시집와서 부터 오로지 내 몸뚱이 하나로 산 거지. 안 해본 거 없어.

땅이 없으니까 농사지을 수도 없고 전주 모래내 시장, 봉동장, 비봉장, 고산장, 안밤실, 바깥밤실, 남봉 온 동네 안 다닌 곳 없이 물건 팔러 돌아다녔지. 묵, 복숭아, 달팽이(다슬기), 그때 그때 채소들 팔았지.

뒷산에서 도토리 주워다가 애들보고 껍질 까라고 시켜, 빻아서 가루 만들어서 묵 만들어서 팔고 달팽이 한 3년 잡아서 팔 때는 내 별명이 물오리였어. 저그 앞에 어우리 냇가에 달팽이가 좋았어. 그거 잡는다고 하루 종일 물속에 있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데. 하루종일 물에 있다가 나오면 핑핑 돌아.

화단 앞에서 웃고 있는 남전자 할머니
화단 앞에서 웃고 있는 남전자 할머니

계속 달팽이만 찾고 잡으니까 모든게 다 달팽이로 보여. 수제비도 보면 국물은 냇물처럼 보이고 수제비 뜬 것은 달팽이로 보였지. 달팽이를 너무 많이 잡아서 그때 눈이 안 좋아지더라고. 지나가는 사람도 잘 안 보이고 밥상 위도 잘 안 보여.

그러니까 셋째 아들이 곁에 앉아서 밥 먹을 때 ‘어무니 이것은 김치여, 이것은 감자여.’ 이렇게 알려주더라고. 니어카에 복숭아 상자 가득 싣고 팔러 다닐 때도 애들들이 고산중학교 다니니까 아침에 학교 갈 때 남봉까지 뒤에서 밀어주며 함께 갔지. 애들이 잘 컸어. 나한테 참 잘 혀. 그것도 팔자인가..

남편 복은 없었어도 장에 나가면 희한하게 나한테 사람이 잘 붙어.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달라붙듯이 나한테 사람이 다글다글 붙어. 시장서 물건 늘어놓고 장사를 하면 사람들이 얼머냐 물어보고 갔다가 도로 돌아와. 돌아오면서 하는 말이 아줌마 인상이 좋아서 다시 왔디야. 나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

전주에서도 마늘같은거 팔면 손님들이 우리 집 주소랑 이름을 꼭 물어봐. 그럼 전주서 여그까지 내외간에 찾아와서 꼭 사가. 그 집 아저씨가 자기는 절대 인상 안 좋은 사람한테는 물건 안 산디야. 내 얼굴 보고 내 물건 사는 사람 많았지. 몰라.. 나 이쁘다고 소문났지.(수줍은 웃음)”

■ 동네 사람들, 애틋한 내 아이들 덕분에 살았지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집 개량과 농로 확장 등 농촌 근대화 사업이 추진되며 시멘트와 벽돌 등 건축자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할머니는 이 시절 마당에서 벽돌을 만들어 팔았다. 모래, 자갈, 시멘트를 할머니가 이고 지고 마당으로 옮겼고 물동이 지고 집 앞 냇가로 내려가 물을 퍼 날랐다. 소금바우 벽돌집 시절, 모진 무게를 견뎌내느라 상해버린 몸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할머니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동네 와서 내 몸으로, 마음으로 인심을 얻어서 그 힘으로 여태껏 살았어. 이 집 이사왔을 때, 아무것도 없는 초가집이었는데 그때 동네 사람들이 와서 마당에 여럿이 앉아서 지푸라기 엮어서 지붕 얹는 것을 도와주데. 나는 돈도 없고 해줄 것이 없으니 몸으로 가서 도와줬지.

농사지으면 가서 샛거리도 해주고, 누구 일하면 거둬들이러 가고. 살아보니까 자고로 욕심 없이 살고 차별을 말아야혀. 없는 사람 괄시하면 안뒤야. 없는 사람이 항시 없이 살가니? 있는 사람도 항시 있는 것이 아니거든. 나는 없는 사람이 더 불쌍해 죽겄데. 뭐든지 함부로 하면 안뒤야.

이웃들에게 나누고 싶어 채송화를 뽑고 있다
이웃들에게 나누고 싶어 채송화를 뽑고 있다

내가 힘들 때 동네 사람들이 잘 해줬어. 평생 이고 지고 돌아다니면서 물건 팔러 다닐 때도 우는 모습 자식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더라고. 저 앞 전봇대 아래에서 혼자 울고 그랬지. 육남매 생각하며 버텼지. 애틋혀. 내가 못 배웠으니까 우리 애들은 꼭 가르치고 싶었어.

우리 딸들도 이른 아침에 등교해서 늦은 밤에 돌아오니까 마음이 안 좋잖아. 후라쉬 하나 들고 데려다주고 마중하느라 학교를 같이 다닌 것 같아. 잘 컸어. 애들이. 내가 노래를 좋아하거든. 젊어서는 내 별명이 이미자였어. 어머니 고생만 했으니 이제는 실컷 노래하시라고 애들이 노래방 기계도 사다 놓았어.”

9년 전에 남편 떠나보내고 이제는 눈치 볼 사람도 없고 마음 상할 일도 없다. 평생 자신의 옷 한 벌, 화장품 하나 사보지 못한 남전자 할머니의 시선이 향한 곳은 꽃이었다.

“나 꽃 좋아혀.. 없이 살 때는 아무것도 못 했지. 일만 알고 장사만 할 줄 알았지. 이제는 아무 걱정도 없어. 애들도 나 보고 좋은 데만 쫓아다니라고 해. 내가 꽃 좋아하는 줄 아니까 아들이 어디서 꼭 꽃모종을 사왔싸. 철마다 심고 피우고 하는 거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집 앞에 지나갈 때 꽃 보느라고 천천히 가. 실컷 꽃 보고 가면 좋지. 옆에 점빵집에도 내가 골고루 꽃을 심어놓았어. 꽃만 보면 좋아. 계속 바라보고 싶어.” 그렇게 좋아하던 꽃을 여든이 넘어서야 활짝 피워냈다. 할머니의 곱고 애틋한 꽃마당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끄트리집 이웃과 쪼그리고 앉아 꽃이야기를 한참 나눈다
끄트리집 이웃과 쪼그리고 앉아 꽃이야기를 한참 나눈다

현장 사진

비봉면 염암마을 남전자 할머니 이야기 사진 1 비봉면 염암마을 남전자 할머니 이야기 사진 2 비봉면 염암마을 남전자 할머니 이야기 사진 3 비봉면 염암마을 남전자 할머니 이야기 사진 4

첨부자료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