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장미경의 삶의풍경

외율마을의 ‘조르바’ 박길수 어르신2014-09-03

외율마을의 ‘조르바’  박길수 어르신

좀 놀아본 이 사람의 잔소리 좀 들어볼테요?

 

외율마을의 ‘조르바’  박길수 어르신

 

백바지에 백구두 빼입은 소년
열아홉에 서울행 열차에 훌쩍
3일간 노숙하며 매서운 신고식

한남동 판잣집에 살았어도
한 달 품삯 털어 
쎄무워커 쌍마청바지 사 입고
1960년대 서울 곳곳 누볐지

하지말란 짓 다 하고 다녔던
철없던 전국구 유랑시절…
화장실에 앉아 떠올리자면
‘10년만 젊었으면…’ 하고 눈물 나

이리 내 젊은 날 돌아보니
자연스레 잔소리쟁이가 되데


박길수 어르신을 만난 것은 올해 봄이었다. 동네 분들 논농사 짓는 모임에 끼어서 모내기하던 때였다. 키가 크고 덩치 좋은 어르신이 우리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하셨다.

 

“지나가던 개가 오줌 눠!”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일 안하고 가만히 서있으면 전봇대인 줄 알고 개가 오줌 눈다고!”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어르신의 잔소리에 혼이 나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옆에 분에게 저 분이 뉘신지 조심히 물었다.

 

“저분이 바로 초보농사꾼들의 농사멘토 길수형님이시다.”

 

외율마을 박길수 어르신 댁

 

농사멘토 길수어르신

 

길수 어르신은 74년도에 밤실 골짜기로 이주해서 40년째 농사짓고 소를 키우고 있다. 어르신이 살고 있는 외율마을에 귀농이나 귀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서툰 농사꾼들에게 그간의 농사 비법을 전수하는데 신이 나신 모양이다. 예전에는 새벽 5시면 일어나 논이나 밭으로 나갔는데 요즘은 신참농사꾼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방문을 두드리며 하루를 시작하신단다. 달콤한 새벽잠을 몰아내는 길수 형님이 야속하겠지만 이것 또한 재밌는 풍경이다.

 

길수 형님은 요즘 젊은 농사꾼들을 보면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고 한다.

 

“주마등처럼 모든 것이 휙 하고 스쳐가지. 요즘은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눈물이 자주 나와. 십년만 젊었으면…. 어렸을 땐 내가 언제 어른이 되지 했는데 벌써 죽을 나이가 되어가네. 걱정이 없던 나이도 지나갔고 파란만장하게 전국구로 돌아다니면서 우리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다녔지.”

 

백바지 입고 무작정 상경

 

길수어르신은 자신이 할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은 것 같다고 하셨다. 맏손자였던 길수어르신을 어린 시절부터 항상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할아버지 따라 기생집도 많이 다니고 꽃장구도 치고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막걸리도 한 모금씩 받아먹으며 술을 배웠다고 한다.

 

19살 되던 해 길수 어르신의 방랑인생이 시작되었다.

 

 

“전주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갔지. 서울 간다고 해서 백바지에 백구두 신었어. 그 당시에는 흰 옷 입는 것이 멋쟁이라고 했었어. 가방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오갈 때가 없어서 서울역 앞 뉴서울극장 근처에서 3일 동안 굶으며 노숙했어. 구두닦이 애들이랑. 하얀 옷이 검은 옷이 됐지. 배가 고프니까 집 생각이 나서 서울역서 철로를 따라 무작정 걸어갔어. 용산 역 지나 동부이촌동 쪽에서 어떤 양반이 쓱 내려오더라고. 길을 물었더니 한강철교 건너서 영등포쪽으로 가라고 그러데. 그래서 다시 흥청흥청 걸어갔지. 근데 그 양반이 정신없이 뒤에서 뛰어오는 거야. 알고 보니 철근 오야지(대장)였던 거야. 그 양반이 날 데려가서 밥을 먹였지. 구세주였지. 밥 4그릇 국 4그릇을 단숨에 해치우고 하룻밤 재워주고는 다음날 그러더라고. 여기서 차비나 좀 벌어서 가라고. 그래서 용산 철도청 짓는 현장에서 철근다루는 일을 시작했지.”

 

쌍마청바지와 세무워커로 서울을 누비다

 

그렇게 한 달을 일한 품삯으로 쌍마청바지(리바이스(Levis)의 별칭)와 세무워커를 사서 멋지게 빼입고 남산구경부터 말죽거리까지 서울 이곳 저곳을 누비며 놀면서 일하며 살았다고 한다. 길수 어르신은 서울이 개발되기 전 1968년경의 모습을 상세히 기억하고 계셨다.

 

“그 당시 서울은 다 여기같이 시골이었어. 그때 강남 말죽거리를 갔더니 별 것도 없더만. 맨 모래뿐이여. 근데 누가 뚝섬갈비가 있디야. 그래서 뚝섬에 가면 갈비집이 많은 갑다 하고 가봤지. 가봤더니 죄다 채소밭이야. 무가 제일로 많더만. 알고 봤더니 강남땅에 심은 채소가 다 서울시내 사람들이 먹는 채소들이었던지. 서울사람들은 여기서 나는 채소를 뚝섬갈비라고 불렀던 게벼. 그때 돈을 알고 땅을 알고 좀 사놨으면 부자가 됐을 판인데 말이여.”

 

서울 강남일대가 뽕밭이었던 시절, 미군부대인줄 모르고 들어가서 오디 따먹다가 혼쭐이 난 사건도 있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개발이 진행되던 시절 공사현장을 전전하며 한남동 판자집에서 세 번의 겨울을 보내고 갑자기 집밥이 그리워지더란다.

 

“젊은 놈들이 개 따라 다니면 개 구녕으로 들어간다고, 아가씨들 만난다고 모아둔 돈 다 쓰고. 그때 서울 한남동 판자촌에 살고 있었어. 일하던 젊은 놈들 대여섯명씩 같이 살았는데 새벽녘에 추우니까 이불 하나 있는 거 서로 덮으려고 잡아당기다 보니까 겨울 지나면 이불이 걸레짝이 돼버려. 그렇게 힘드니까 고향 생각이 나더라고 잘 먹고 놀 때는 부모 생각이 안나. 고생하니까 생각 나는 거야. 부모밥이 그리운거지.”

 

29살 되던 해 대구에서 만난 스무살 앳된 아가씨와 부부의 연을 맺고 고생하며 살아낸 시간들. 그리고 이곳 외율마을에 살고 있는 현재까지. 정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젊은 시절들이다.

 

놀아본 사람의 잔소리

 

“내가 잔소리를 많이 하긴 하지만 내 젊었을 때 생각이 나서 잔소리를 좀 하지. 농사는 주둥아리로 지으면 안돼. 머리와 손으로 지어야 해. 여물게 해라, 야무지게 해라. 농사꾼 손이 가면 어느새 밭 되네라는 농가가 있듯이 땀 흘린 만큼 뿌린 만큼 수확해서 주변사람들과 같이 나눠먹고 지내면 좋은 거 아녀.”

 

길수 어르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다 쓰자면 지면이 한 없이 부족하다. 궁금한 이들이 있다면 추수할 무렵 새참거리로 막걸리 한통 사들고 길수어르신을 찾아가 보도록 하자.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날 것이다.

 

손녀딸과 정원에 핀 꽃을 감상하고 있는 박길수 어르신.

 

-그리스 인 조르바 中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부딪쳐 작살이 나면 그뿐이죠. 그래봐야 손해갈 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나요? 물론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

/글 사진=장미경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우리가 누구? 상관사는 아줌마들!
다음글
두억마을 삼거리점빵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