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복식당을 아시나요?201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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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정갈한 밥상과 닮았다. - 오복식당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고명순 할머니: 처음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했어, 이 자리에서(경천 우체국 맞은 편 방면). 근데 여기 앞에 도로포장 할 때 측량을 하러 왔더라고(1980년대 초로 추정: 완주군 통계연보 도로현황 참조) 측량기사 둘이 왔는데 아주머니, 라면 좀 삶아 주면 안 돼요? 그러더라고, 구멍가겐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삶아서 김치하고 갔다 줬어. 김치를 먹어 보더니 홀딱 미쳐버리네. 라면 먹다가. 왜 이렇게 김치가 맛있냐. 그러는 거야.
임용복할머니: 환갑 때 찍은 거야. 제주도 가서. 그때 동갑계 친구들하고 환갑기념으로 여행을 갔거든. 나이가 동갑인 친구들하고 계들 들었는데 회원이 6~7명 정도였어. 그 중에서도 이 친구(고명순 할머니)하고 마음이 제일 맞았어. 기념으로 원삼 쪽두리 입고 사진 좀 찍자 그래서 같이 찍었지. 이 친구 집에도 이렇게 걸려 있고 우리 집에도 똑같은 사진 걸려 있어. 명순이도 신랑 죽은 지 십년 넘었을 거야. 서로 혼자니까 위안이 됐지
할머니 두 분의 오랜 연륜과 한 몸처럼 움직이는 호흡.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반찬을 직접 날라다 먹는 단골손님들 덕분에 바쁜 점심시간도 문제없다.
고명순 할머니는 집에서 들기름 발라 구운 김을 내놓으셨다.
보니까 라면 다 먹고 국물이 남아 있길 래, 밥 한 공기 줄까요? 그랬더니 아유 그러면 고맙지유. 그래서 밥 한 공기 줬더니 둘이 나눠서 딱 먹더라고.
그러더니 아주머니 앞으로 우리 밥 좀 해주면 안 되냐고 그러는 거야. 도로포장하는데 인부들 밥 먹을 데가 없으니까 함바집을 하라 이거지. 그래서 두 사람 보고 내가 어떻게 밥을 해주냐고 그랬지. 근데 그 측량기사가 김치를 먹어보더니 마음에 딱 드니까 여기서 밥을 쪼개 해주면 좋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몇이나 되간디요 물었더니 차차로 이리 다 올것이요 그러네. 그래서 밥을 해주기 시작했어. 며칠 먹더니 오늘은 셋이 와. 내일은 다섯 명 와. 그 이튿날은 더 많이 오고. 백 명까지 먹여봤어. 여그서. 상이나 차려 줬간디. 김치한가지하고 찌개에다 밥 덜푸덕 부어가지고는 바깥에서 서서 먹고 그랬어. 며칠 먹더니 나보고 비디오플레이어를 사랴. 저쪽 큰 방(식당 뒷방)을 치워서 덤프차 기사들 다섯 명이 와서 하숙 한디야. 한 달만 있으면 아줌마 비디오플레이어 값 챙겨 줄랑게 하나 사라고 해서 비디오하고 티브이 사다가 방에 갔다 놨더니. 저녁이면 막 먹는 거야. 테이프는 지들이 빌려가지고 오고 나는 안주해서 먹이기 바빴지.
12월 한 달 장사해서 그때 돈 천 만원이면 엄청 큰 돈 인데, 천 만원을 벌었어. 12월 말일에 정산해준다고 돈을 찾으러 오리야. 우리 바깥 양반한테 갔다 오라고 했더니 어린 직원들 있는데 돈 받으러 가는 것이 쪽 팔려서 안 간디야. 그래서 내가 갔지. 그때 용진에 국제 건설이라고 있었어. 거기로 장부를 딱 가지고 갔더니 계산해 주더라고. 그래서 현금을 찾아 가지고 택시 타고 집으로 갈라고 하는데, 현금 가지고 가면 위험하다고 국제 건설 직원이 덤프트럭으로 우리 집 까지 친절히 또 태워다 준거야.
나중에는 허가를 내라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공무원들이니까 그런 것이 신경이 쓰이잖여. 근데 나는 어떻게 허가 내는 지도 모르다고 그랬더니, 면 직원들이 자기 일처럼 왔다갔다하면서 식당허가를 다 만들어줬어. 면 직원, 파출소 순경들 할 것 없이 다 허물없이 지냈어. 몇 년 전에는 저그 파출소에서 공로상도 주더만. 공로상 줄라니까 한복 곱게 차려 입고 상 받으러 오라고 했어.
오복식당에서 처음으로 밥을 먹게 된 것은 작년 늦은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완주에서 일을 하는 지인들로부터 오복식당 예찬을 간간히 들어왔던 터라 그곳의 짭잘한 전라도식 밑반찬이나 주인장 마음 내키는 대로 끓여내는 찌개들을 꼭 먹어 보고 싶었다.
점심 한 나절만 장사를 하는 곳이어서 조금 늦게 가면 자리가 없어 그냥 나와야 할 때가 많단다. 그날은 주인할머니가 거주하시는 안방에 친절히 상을 차려주셔서 그 곳에서 점심을 기어코 먹을 수 있었다.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주인할머니의 화장대, 걸려 있는 옷가지들을 살펴보았다. 벽에 걸린 사진액자들이 눈에 띄었다. 자식며느리하고 찍은 가족사진과 귀여운 손주들 사진, 친구들 끼리 단체여행 간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 중에 고명순할머니, 임용복할머니 두 분이 원삼쪽두리를 갖춰 입고 신랑신부처럼 다정하게 찍은 사진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그로부터 1년 뒤에 다시 오복식당을 찾아 이 사진에 대해 물었다.
내가 무슨 일 있으면 이 친구가 다 와서 도와줘. 병원에 가나 어딜 가나.. 함께 있어야 마음이 편해. 이 친구가 나한테 너무 잘해. 나는 집안사람이 전부 서울로 이사 가서 여기에 혼자 있어. 그러니까 아파도 외롭잖아. 근데 이 친구가 와서 도와줘. 다른 사람들은 한번 면회 오고 말잖아, 근데 이 친구는 맨날 와. 퇴원해서 집에 올 때 까지.
늙어서 아프면 너하고 한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 그랬지.
임용복할머니: 어느 날 가서 일을 했더니 돈을 줘. 아 근데 너하고 나하고 친군데 무슨 돈이냐. 안받는다 그랬어. 그랬더니 한사코 받으랴. 니가 와서 안하면 남이라도 다 주니까 받으랴. 친구지간에 조금 도와 준건데 무슨 돈이냐 그러는데 그래도 받으랴. 그래도 미안터라고. 그래서 함께 하기 시작했어. 이 친구가 나한테 너무 잘해. 조금만 일해도 돈도 많이 주고 미안해.
고명순할머니: 아녀 얘가 나한테 더 잘혀.
고산에서 경천을 지나 운주로 향해 구불구불 대둔산을 넘고 논산 대전으로 통하는 17번 국도. 이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일을 하고 그 와중에 이곳 오복식당에 들러 밥을 먹는다. 특히 고단하게 몸을 쓰며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곳을 많이 찾는다. 별다른 반찬은 없다. 그저 옛날 엄마가 해주던 별 것 아니던 밥상이다. 할머니 두 분은 늘 그렇듯 자기들 친 동생이 온 냥, 자기들 자식들이 온 냥, 옛날 엄마처럼, 친 할머니처럼 밥상을 차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