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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손때 묻은 방앗간, 이젠 내가 돌린다”2014-01-07

아버지 손때 묻은 방앗간, 이젠 내가 돌린다”

“아버지 손때 묻은 방앗간, 이젠 내가 돌린다”
 
 
방앗간 잇는 강기석씨
 
 
1년전 서울서 내려와 정미소 이어받아
처음엔 서툴러 쌀 담다 쏟기도 여러번
이젠 제이름으로 로컬푸드 납품까지

한 해의 마지막 날에도 강기석(41)씨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용진면 원간중마을 원간중정미소. 기석씨는 쌀을 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정미된 쌀을 포대에 담아 차곡차곡 쌓는가 하면 어느 순간엔 지게차로 거대한 벼 포대를 운반했다. 그러다 누군가 쌀을 사러 오면 친절하게 쌀 포대를 실어 날랐다.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석씨는 작년 가을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방앗간을 이었다. 그는 의료기 회사에서 10년 일했다는데 옆에 있던 어머니 이을순(64)씨는 “높은 데까지 올라갔었다”고 거들었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회사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졌지만 이 일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게다가 추수 후 50일은 정말 바쁘다. 대목이기 때문이다. 50일 동안 매일 방아를 찧었다. 하루에 많게는 쌀 40kg 200포대를 찧었다. “그나마 요새는 좀 살만해요. 몇 시에 시작하는 게 없어 누가 오면 시작하죠.”
 
방앗간 일은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했다. “직장 생활이란 게 그렇잖아요. 나중에 끝까지 올라가면 좋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해서 처음엔 고민을 많이 했죠.” 처음엔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일단 따로 쉬는 날이 없다보니 그게 젤 힘들었어요.” 기석씨는 “아버지가 농사를 주로 지었는데 이거(정미소)하고 병행하다보니 힘들어 했다. 그나마 요즈음 제가 (방앗간을) 전담하니 좀 덜 힘들어 하신다”고 덧붙였다.
 
어머니 이씨는 “처음엔 ‘아버지 선에서 끊어요’ 하더니 내려와서는 열심히 한다”며 “평생한 사람하고 많이 다를 텐데도 인상  한 번 안 찌푸리고 잘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기계를 다룰 줄 몰라 실수도 많이 했다. 일을 배울 때는 아버지가 기계를 만지고 쌀을 받아내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힘들어 쌀을 담다 쏟기도 여러 번 했다.
 
강기석1.jpg

 
도정과정은 몇 단계로 나뉘는데 일단 벼를 투입구에 넣고 돌과 불순물을 골라낸다. 이후 껍질을 벗겨 쌀을 깎은 뒤 부스러진 쌀을 골라내고 포장하면 도정과정이 끝난다.
 
쌀 포대에는 도정날짜와 원산지 표시가 꼭 들어가는데 관리를 잘 해야 한다. “그래서 누가 마대 좀 달라고 해도 안줘요. 잘못하면 방앗간 이미지가 나빠지기 때문이죠.”
 
기석씨는 방앗간 외에도 하는 일이 더 있다. 직접 키운 농산물을 로컬푸드 직매장에 내고 있는 것. 봄에 시금치, 오이 등을 내놓았는데 반응이 좋았다.
 
“로컬푸드 납품은 2012년부터 시작했는데 교육일수가 모자라 아버지 이름으로 내다가 지난해 5월부터는 제 이름으로 오이부터 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흑미를 내놓고 있는데 용진농협 직매장에서만 일주일에 30여개씩 나간다. 강씨는 “지난해 100마지기의 농사를 지었는데 흑미만 열다섯 마지기를 지었다”고 말했다.
 
“직장생활하면 월급이 나오는데 농촌생활은 그게 아니잖아요. 농사만 지으면 가을에 현금 좀 만지고 봄부터 여름까지는 특별한 소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로컬푸드에서 판매대금이 월급처럼 들어오니 생활에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판로가 고민이었다. “도매시장 나갔는데, 모르겠어요. 가격이 들쑥날쑥하고 같은 물건인데도 상황에 따라 왔다갔다 하는 걸보니 처음엔 굉장히 맘이 안 좋더라고요. 다른데 올라가도 처음 낸 가격 거의 비슷하게 나가거든요. 오이 같은 경우 처음엔 쌌다가 나중엔 비싸도 변동 없이 계속 같은 값으로 내잖아요.”
 
그는 요새 로컬푸드라는 큰 흐름 속에서 농산물 가공제품 생산이라는 계획도 세웠다. 여기에는 부인 최기만(39)씨도 한몫했다. 귀향을 결심한 뒤 최씨를 설득하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최기만씨는 내려와서도 한동안 힘들어했다. 하지만 다양한 교육활동을 통해 지역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달라졌다. 그는 “(부인 최씨가)지금은 쌀 가공품을 만들겠다며 농민거점가공센터에서 쌀 과자 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강기석2.jpg

“가업 이은 우리아들 든든하고 말고~”
 
기석씨 어머니   이을순씨
 
“든든하고 말고. 속으론 그렇지만 그래도 대놓고 아들 잘한다 잘한다 어떻게 해.”
 
강기석씨의 어머니 이을순(64)씨는 1년 전 서울에서 내려와 정미소를 맡은 아들이 자랑스럽다.이씨는 요즘 남편이 입원 중이어서 아들과 함께 방앗간을 돌리고 있다. 이씨가 남편을 대신해 정미기를 조작하고 기석씨가 보조한다.
 
“딱 20년 됐어. 그때만 해도 여 금방에 방앗간이 상운리 1개 용흥리 1개 오천리 1개 있었지. 인자 여그만 남아있지.”
 
옛날에 아저씨는 5톤 화물차(운전)했다고 한다. “방앗간 아저씨하고 아줌마 둘이 운영 했는데 그쪽에서 하도 해보라고 권유해서 인수하게 됐지.” 그러다가 원래 있는 건 다 뜯어내고 다시 했다.
 
“이제 와 없앨 수는 없고 지금은 또 가업을 잇는 사람을 좋게 보더라고.” 기석씨가 대를 잇겠다고 나선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이씨는 또 “아들이 꼼꼼하고 기계와 컴퓨터 잘 다룬다”며 “(아들이) 잘 운영하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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