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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화전이 삼나무-편백숲으로 2013-06-07

40년전 화전이 삼나무-편백숲으로

 

쑥재골의 삼나무 숲. 40여전 화전이었던 곳이 울창한 숲으로 변했다.
 
 
6~7월이 더 바쁘다
쑥재골 사람들은 6, 7월이 더 바쁘다. 상당수가 담배, 매실, 복숭아 등을 재배하기 때문이다. 담배는 6월부터 본격적으로 잎을 따기 시작해 뜨거운 7월까지 이어진다. 특히 담배는 수확한 뒤 잎을 엮어 건조하는 과정에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어서 일손이 모자란다. 
이선례(79) 할머니는 “6, 7월이 되면 담배 밭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쑥재골 사람들은 남의 일을 많이 다니는데 하루 품삯이 여자는 5만원, 남자는 10만원이다. 할머니들은 “일은 여자들이 더 잘하는데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싸리농사 짓는 이용교-김영자 부부
 
이용교 부부.jpg
 
팔순을 넘긴 할아버지는 오늘도 바삐 움직였다. 이른 아침부터 산자락 고추밭에 약을 주고 날짐승이 침범 못하도록 주어온 현수막으로 울타리를 쳤다.
“이런다고 짐승이 들어오지 못할까마는 이렇게라도 해놔야 마음이 놓이거든.”
쑥재골 토박이인 이영교(81) 할아버지와 부인 김영자(75) 할머니는 요즘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싸리(조팝나무)꽃씨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산에서 자생하는 조팝나무 씨앗을 훑어오면 할머니가 좋은 씨앗을 골라낸 뒤 말려 심는다. 모종으로 자란 조팝나무는 이듬해 조경용으로 판다.

“한 5~6년 됐지. 아들이 한 게 심지.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 콩이나 팥 심고 살제.” 노부부의 아들은 전주에서 조경업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싸리나무 알이 아직 안 여물었다”며 “늦은 봄까지 서리가 내려 꽃이 잘 피지 않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씨가 다 빠져 부렀네. 요게 씨여 요건 껍데기.” 할머니가 쭉정이를 골라내며 맞장구를 쳤다.
이 할아버지는 쑥재골에서 나고 자랐다. 부인 김 할머니는 임실에서 시집와 아들 둘 딸 다섯을 키워냈다. “아들도 효자고 며느리도 그만 허믄 됐다”는 할머니는 자식들 보러 부산 한 번 가야하는데 “이러고 늙어버린다”며 웃었다.
 
40년 전 화전이 울창한 삼나무-편백숲으로, 쑥재골의 변신
쑥재골의 행정명은 내아마을이다. 골짜기로 쑤~욱 들어갔다고 해서 쑥재골이라 불렸다고도 하지만 내애(內艾)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쑥이 많은 골짜기여서 쑥재골이라 불렸다는 게 정설로 전해지고 있다.
내아마을에는 35가구 70여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다. 담배와 매실, 복숭아가 주요 재배작목이다. 워낙 공기가 맑은 곳이라 귀촌한 사람들도 더러 있다.

쑥재골은 화전민이 많았던 곳이었다. 70년대 정부가 화전민을 이주시키기 전만 해도 여기저기 화전을 일궈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민들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가구당 30만~40만원을 주며 이주 시켰다고 한다. 화전에서는 녹화작업이 진행됐다. 쑥재골은 주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심어졌다. 이용권 이장은 편백나무를 가리키며 “모두 40년 전에 화전민을 소개한 뒤 심어진 것들”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 나무가 지금 울창한 숲을 이루어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쑥재골은 또 칡즙을 가공해 공동체사업을 펼치고 있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출자했다. 군의 지원으로 가공장을 만들고 식품가공허가도 받았다. 멋있는 마을가꾸기 사업에 선정돼 문패달기와 벽화사업도 진행했다. 집집마다 원하는 택호를 정해 문패를 만들었는데 22년 전 귀촌한 한국화가 윤명호 화백이 재능을 기부했다.
 
22년전 쑥재골에 둥지 윤명호 화백... 내게 텃밭은 최고의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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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호 화백이 집 마당에 꽃과 채소를 심어놓은 정원텃밭을 돌보고 있다.

 
텃밭인지 꽃밭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마당 한 편에 자리한 작은 밭에는 상추와 꽃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 단아했다. 뜨거운 볕이 내리쬐기 시작하자 밭을 돌보던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한국화가 윤명호(72) 화백. 그는 22년전 쑥재골에 터를 잡았다.
텃밭에는 상추 오이 가지 토마토와 꽃이 사이좋게 자라고 있었다. 작물은 “사람들이 오다가다 뜯어가라고 심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서리가 올 때까지 가라고 이것저것 심어놓았다. 그의 텃밭에서 작물들은 주어진 시간을 살다 자연으로 돌아간다. 상추에 꽃이 올라오면 뽑아낸다. 그 자리에 고추가 남는데 약을 안치니 이도 금방 죽고 나중엔 가지만 남는다. 비닐을 씌우지도 않았다. 가끔 풀을 뽑고 땅을 뒤적거려야 땅이 숨을 쉴 수 있다.
“시골 일은 아무리 손대도 일한 흔적이 안남지만 손 놓고 있으면 금방 테가 나요.”
벼논에 피 가 있듯이 채소밭에도 풀씨가 저하고 비슷한 채소나 꽃 잔디에 기생해 산다.
그래서 가끔 풀을 뽑으며 자연의 오묘함을 많이 배운다고 했다. 그는 한 뼘의 땅도 놀리지 않으려 했는데 화단에 채소를 심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꽃 잔디가 심어진 한 뼘 땅에도 고추 모종을 심어 놨다. 모종 사이에는 예쁜 꽃나무가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윤명호 화백1.jpg

그림작업을 하고 있는 윤명호 화백.

풀베기를 마친 화백은 작업을 위해 집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그리다만 풍경화가 거실에 펼쳐져 있었다. 윤 화백은 “소희영 명창의 무대병풍을 그리는 중”이라고 했다. 12폭짜리 병풍이었다. 그는 “옛날에는 아무 때나 일을 했는데 지금은 한 시간만 그려도 힘이 부친다”며 “그럴 때마다 밖에 나가 텃밭의 풀이라도 뽑는다”고 했다. 토종닭도 20마리 키우고 있다. 주로 작업은 비오는 날 밤에 하고 낮에는 마당 텃밭의 채소를 가꾸며 쉰다. 그에게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조화가 건강한 삶의 관건인 듯했다.
윤 화백은 “남을 위해 뭔가 했을 때와 자연에 있을 때가 가장 즐겁다”고 했다. 마당 앞 텃밭은 그에게 세상에 가장 편한 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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