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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도 손님도 40년 세월 늘 그대로였다. 2013-04-17

주인도 손님도 40년 세월 늘 그대로였다.

 

소양 평리마을 이발소
 
 
소양 평리마을엔 작은 이발소가 있다. 이발소는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고샅길에 보일 듯 말듯 있다. 흔한 간판도 없고 이발소를 상징하는 사인볼도 없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날 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조심스레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 가운을 차려입은 노년의 이발사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정겨웠다.
손님이 나간 뒤 자리에 앉자 주인은 못 보던 사람이라며 궁금해 한다. 손길은 섬세했다. 머리를 깎고 감는데 족히 40분은 넘게 걸렸다. 이발을 마친 뒤 찾아온 속내를 털어놓자 주인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주인은 친절하게도 이발소의 역사를 더듬었다. “1973년에 문을 연 것 같아. 그 전에도 다른 주인이 좀 했지. 그 후로 특별한 개보수를 하지 않아서 이렇게 궁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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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도 없다고 하자. “집은 허술한데 간판 붙이기도 뭐하고 사인볼 돌리는 것도 뭐하고 해서 안하게 돼.”
3.5평과 4평 어디쯤 서 있는 이발소에는 이발의자 2개와 커다란 거울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면도 거품을 묻히는 신문지나 물을 대우는 연탄난로, 손님이 머리를 감을 때 물이 튀는 것을 막아주는 가리개, 꼬마들을 배려한 판자 등 소박한 소품들이 불혹을 넘긴 이발소의 소중한 재산들로 다가왔다. 벽에는 빛바랜 유신시대 기관장 감사장이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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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들이 더 걱정이다. ‘밥벌이가 될까. 하루에 손님이 몇 명이나 올까.’ 그래도 마을 골목에 위치한 이발소는 이젠 으레 있어야 할 곳이 되어버렸다. 화려하고 빠르고 세상의 영악스러움에 모든 것이 바뀌어도, 하루 대 여섯 명의 손님이 올까 말까 해도.
지금은 이발소가 동네 골목에 자리 잡은 듯 보이지만 옛날엔 신작로였다. 당시만 해도 평리마을은 소양면에서 단일마을로는 사람이 가장 많이 살았다.
주인은 74년 결혼해 4남매를 뒀다. 딸 둘에 아들 둘. 막내만 빼곤 모두 시집장가를 보냈다.
 
 
 
 
 

“한길로만 왔어. 다른 욕심냈으면 집어 치웠을 것이여.
                생각하면 정년퇴임도 없고 내 능력이 되면 더 할 수 있어 좋은 것 같아.”
일은 혼자 했다. 대목 때나 가끔 바쁠 때 머리 감겨주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이발소 옆에 단칸방이 있는 데 1995년까지 이곳에서 여섯 식구가 함께 살았다. 지금은 점심 도시락을 먹는 휴게실로 쓰고 있다.
손님들은 “기왕에 시작한 거 시내 가서 차리지 그러느냐”고 말한다. 주인이 이곳을 떠나지 않은 데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도시 가봤자 세주고 이것저것 떼면 남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곳도 자신의 땅은 아니지만 그래도 익숙하고 편하다. 평리마을은 소양면 끝 마을로 용진면, 전주시 경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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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발소 내부모습


이발소는 동네 사랑방이다. “대게 손님들이 여럿 모이니깐 정보가 빠르다. 근데 그것도 손님들이 말을 해줘야 하는데 말을 안 하면 모른다.” 마을 사람 대소사도 다 알고 그랬다. 70~80년대에만 해도 바리깡(이발기계) 대고 이발을 하니 보통 보름 안에 한 번씩 이발을 했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도 올까말까 하다. 당연히 손님이 줄었다.
단골들은 이발소가 사라질까 걱정인 모양이다. 후계자라도 세워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후회는 안 해. 60~70년대만 해도 이발사는 상당히 좋은 기술자였어. 우스갯소리로 대통령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이발사와 사진사라고 하질 않았나.”
 

 
0003.jpg새 건물을 짓는 게 낫지 않느냐고 거드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주인장은 “나이가 먹고 많이 해봤자 10년”이라며 “건강이 허락한다면 더 할 수는 있겠지만 특별한 욕심은 없다”고 했다.
60~70년대에는 여학생들의 단발머리도 이발소에서 잘랐다. 그 만큼 이발소가 많았고 미용실은 적었다. 여자상고머리(뒷부분을 쳐 올리는 스타일)도 이발소에서 했던 것이 일반화된 시절이었다. 또 당시에는 집에서 엄마들이 가위로 잘라주는 게 보통이었다. 그랬다. 옛날에는 결혼하는 신랑들이 장가가려고 이발소해서 화장하고 이발했다. 지금은 모두 미용실로 가지만.
주인의 유일한 벗은 라디오다. 아침에 문을 열며 틀어놓으면 퇴근할 때야 끈다. 옛날에는 뉴스를 주로 들었다. 오죽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발소 문을 빼꼼히 열고 “오늘 비온데?”하고 물었다. 농사로 바쁜 철에는 농작물을 널어놓고 그럴 때는 날씨가 궁금한데 물을 곳이 이발소였던 셈으로 마을의 소식통 격이었다. 요즘 같은 농사철에는 집에 아무도 없어 택배를 맡겨놓는 곳이기도 한다.
시골 이발소여서 농사철에는 한가하다. 농사철에는 비라도 와야 손님이 좀 있다. 동네가 텅 비면 이발소는 더 고요해진다. 그렇다고 조급해 할 것도 없다.
“어릴 때부터 여그서 깎았지. 지금도 다른 데는 안가.” 평리 사람들에겐 공공재인 셈이다. 60~70년대엔 이발비가 150원이었다. 지금은 면도까지 합쳐 8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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