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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식당을 아시나요2013-04-17

오복식당을 아시나요

 

오복식당 고명순할머니와 임용복할머니.
 
오복식당을 아시나요?
경천읍내 도로가에 작은 식당이 하나 있다. 아주 작은 간판이 삐딱하게 달려 있을 뿐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12시부터 2시. 점심장사만 반짝하고 문을 닫는 낮도깨비 같은 식당. 식당 문을 열면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 두 분이 손님을 맞이한다.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아도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 십여 가지가 넘는 밑반찬을 상 위에 펼쳐놓고 화룡점정으로 그 날의 찌개를 가운데에 떡 하니 놓아둔다. 그리고 무한리필 쌀밥!
할머니 두 분의 오랜 연륜과 한 몸처럼 움직이는 호흡.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반찬을 직접 날라다 먹는 단골손님들 덕분에 바쁜 점심시간도 문제없다.
 
반찬1-1.jpg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정갈한 밥상과 닮았다.
 
 
 
 
미쳐버리는 김치 맛 때문에 시작한 오복식당
고산에서 경천을 지나 운주로 향하는 울퉁불퉁했던 시골길이 포장도로로 닦여 17번 국도가 되는 사이, 동네구멍가게에서 함바집으로, 그리고 지금의 오복식당으로 자리 잡기 까지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떠날 사람들은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할머니 두 분이 고단하고 외로운 마음 서로 의지하며 여전히 오복식당을 지키고 있다. 점심손님들 떠난 오후 1시가 훌쩍 넘은 시간. 오복식당의 주인장 고명순 할머니(71), 그리고 그녀의 30년 지기 단짝 친구 임용복 할머니(71)와 조그만 상에 둘러 앉아 늦은 점심을 함께 했다.
고명순 할머니는 집에서 들기름 발라 구운 김을 내놓으셨다.
 
오복식당 정면샷 복사본.jpg
                    오복식당은 점심시간만 반짝 장사를 하고 문을 닫는다. 저녁을 먹기위해서는 예약문의를 해야 한다.
 
 
- 오복식당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고명순 할머니: 처음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했어, 이 자리에서(경천 우체국 맞은 편 방면). 근데 여기 앞에 도로포장 할 때 측량을 하러 왔더라고(1980년대 초로 추정: 완주군 통계연보 도로현황 참조) 측량기사 둘이 왔는데 아주머니, 라면 좀 삶아 주면 안 돼요? 그러더라고, 구멍가겐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삶아서 김치하고 갔다 줬어. 김치를 먹어 보더니 홀딱 미쳐버리네. 라면 먹다가. 왜 이렇게 김치가 맛있냐. 그러는 거야.
보니까 라면 다 먹고 국물이 남아 있길 래, 밥 한 공기 줄까요? 그랬더니 아유 그러면 고맙지유. 그래서 밥 한 공기 줬더니 둘이 나눠서 딱 먹더라고.
그러더니 아주머니 앞으로 우리 밥 좀 해주면 안 되냐고 그러는 거야. 도로포장하는데 인부들 밥 먹을 데가 없으니까 함바집을 하라 이거지. 그래서 두 사람 보고 내가 어떻게 밥을 해주냐고 그랬지. 근데 그 측량기사가 김치를 먹어보더니 마음에 딱 드니까 여기서 밥을 쪼개 해주면 좋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몇이나 되간디요 물었더니 차차로 이리 다 올것이요 그러네. 그래서 밥을 해주기 시작했어. 며칠 먹더니 오늘은 셋이 와. 내일은 다섯 명 와. 그 이튿날은 더 많이 오고. 백 명까지 먹여봤어. 여그서. 상이나 차려 줬간디. 김치한가지하고 찌개에다 밥 덜푸덕 부어가지고는 바깥에서 서서 먹고 그랬어. 며칠 먹더니 나보고 비디오플레이어를 사랴. 저쪽 큰 방(식당 뒷방)을 치워서 덤프차 기사들 다섯 명이 와서 하숙 한디야. 한 달만 있으면 아줌마 비디오플레이어 값 챙겨 줄랑게  하나 사라고 해서 비디오하고 티브이 사다가 방에 갔다 놨더니. 저녁이면 막 먹는 거야. 테이프는 지들이 빌려가지고 오고 나는 안주해서 먹이기 바빴지.
12월 한 달 장사해서 그때 돈 천 만원이면 엄청 큰 돈 인데, 천 만원을 벌었어. 12월 말일에 정산해준다고 돈을 찾으러 오리야. 우리 바깥 양반한테 갔다 오라고 했더니 어린 직원들 있는데 돈 받으러 가는 것이 쪽 팔려서 안 간디야. 그래서 내가 갔지. 그때 용진에 국제 건설이라고 있었어. 거기로 장부를 딱 가지고 갔더니 계산해 주더라고. 그래서 현금을 찾아 가지고 택시 타고 집으로 갈라고 하는데, 현금 가지고 가면 위험하다고 국제 건설 직원이 덤프트럭으로 우리 집 까지 친절히 또 태워다 준거야.
 
- 구멍가게에서 시작된 것이 주변의 권유로 오복식당을 하게 되었군요.
그렇지. 그래갔고 장사가 잘 되니까. 면사무소, 파출소, 농촌지도소에서도 자기들 점심해달라고 하데. 그래서 24명 정도의 점심을 차려줬어. 직원들은 자기들 숙직실에서 자고 삼시세끼 밥만 우리 집에서 먹었지.
나중에는 허가를 내라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공무원들이니까 그런 것이 신경이 쓰이잖여. 근데 나는 어떻게 허가 내는 지도 모르다고 그랬더니, 면 직원들이 자기 일처럼 왔다갔다하면서 식당허가를 다 만들어줬어. 면 직원, 파출소 순경들 할 것 없이 다 허물없이 지냈어. 몇 년 전에는 저그 파출소에서 공로상도 주더만. 공로상 줄라니까 한복 곱게 차려 입고 상 받으러 오라고 했어.
 

한 동네 사는 할아버지 기억 속의 오복식당
오복식당 맞은편에 사시는 김남식(74)할아버지는 40여년 전, 오복식당이 작은 구멍가게이던 시절을 기억하고 계셨다. 마을 앞 도로가 포장공사를 하기 전에는 경천에 자동차가 귀했다고 한다. 차가 귀하니 고산 읍내 나가는 일도 큰 일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을 동네에서 해결했는데 특히 비가 와서 일을 못하는 날이면 길가 구멍가게에서 술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 근처에 비슷한 구멍가게들이 더 많았는데 그 중에 오복식당은 집주인이 손끝이 야무지고 손맛이 좋아 나물 같은 것도 조물조물 묻혀내고 된장이나 고추장도 집에서 직접 담아 음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측량기사들이 김치 맛보고 홀딱 반해서 함바집하라고 제안하지 않았겠는가.
 
-할아버지는 오복식당 밥 맛이 어떠세요?
김남식 할아버지: 시골사람이 뭐 이런데서 밥 사먹나. 근데 차타고 지나는 사람들, 시골 것 좋아하는 양반들이 지나가다 많이들 오더만. 음식 먹어보고는 옛날 어머니 음식이라고, 나는 모르겠는데 손님들이 먹어보고는 그러고 가데.  
 
 

일하는 모습-1.jpg
친구라고 다 친구가 아니야.
너랑 나랑 마음이 맞으니 오래도록 함께 하자.

오복식당에서 처음으로 밥을 먹게 된 것은 작년 늦은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완주에서 일을 하는 지인들로부터 오복식당 예찬을 간간히 들어왔던 터라 그곳의 짭잘한 전라도식 밑반찬이나 주인장 마음 내키는 대로 끓여내는 찌개들을 꼭 먹어 보고 싶었다.
점심 한 나절만 장사를 하는 곳이어서 조금 늦게 가면 자리가 없어 그냥 나와야 할 때가 많단다. 그날은 주인할머니가 거주하시는 안방에 친절히 상을 차려주셔서 그 곳에서 점심을 기어코 먹을 수 있었다.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주인할머니의 화장대, 걸려 있는 옷가지들을 살펴보았다. 벽에 걸린 사진액자들이 눈에 띄었다. 자식며느리하고 찍은 가족사진과 귀여운 손주들 사진, 친구들 끼리 단체여행 간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 중에 고명순할머니, 임용복할머니 두 분이 원삼쪽두리를 갖춰 입고 신랑신부처럼 다정하게 찍은 사진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그로부터 1년 뒤에 다시 오복식당을 찾아 이 사진에 대해 물었다.
 
 
 
원삼쪽두리사진-1.jpg
- 이 신랑 신부 사진은 언제 찍은 거예요.
임용복할머니: 환갑 때 찍은 거야. 제주도 가서. 그때 동갑계 친구들하고 환갑기념으로 여행을 갔거든. 나이가 동갑인 친구들하고 계들 들었는데 회원이 6~7명 정도였어. 그 중에서도 이 친구(고명순 할머니)하고 마음이 제일 맞았어. 기념으로 원삼 쪽두리 입고 사진 좀 찍자 그래서 같이 찍었지. 이 친구 집에도 이렇게 걸려 있고 우리 집에도 똑같은 사진 걸려 있어. 명순이도 신랑 죽은 지 십년 넘었을 거야. 서로 혼자니까 위안이 됐지
내가 무슨 일 있으면 이 친구가 다 와서 도와줘. 병원에 가나 어딜 가나.. 함께 있어야 마음이 편해. 이 친구가 나한테 너무 잘해. 나는 집안사람이 전부 서울로 이사 가서 여기에 혼자 있어. 그러니까 아파도 외롭잖아. 근데 이 친구가 와서 도와줘. 다른 사람들은 한번 면회 오고 말잖아, 근데 이 친구는 맨날 와. 퇴원해서 집에 올 때 까지.
 
- 두 분은 언제부터 친해졌어요.
고명순 할머니: 어느 날은 계를 한다고 갔는데 얘(임용복할머니)가 없어. 뭐 어쩌고 저쩌고 말 같지도 않는 이유로 동갑계에서 뺐디야. 그래서 내가 그랬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딨냐고 막 뭐라고 했어. 그래서 그때 둘이 동갑계 탈퇴하고 나와 버렸어.
임용복할머니: 이 친구가 쑴뻑 그 이야기를 하는데 인상적이더라고. 참말로 친구는 친구네. 그렇게 까지 생각을 해주는데 너무나 고맙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네.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데 앞으로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잘 살아야 겠다, 그랬지. 친구하고 변치 말고 지내야지.. 가슴에 묻혀 있어.
고명순할머니: 그러니까 아프면 똑같이 한 병원에 가서 누워있자고 했어. 내가.
늙어서 아프면 너하고 한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 그랬지.
 
 
임용복 할머니는 마흔 셋에 남편을 먼저 여의고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식당일을 시작하셨다. 그 와중에 동갑계를 통해 고명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말다툼 없이 30년 지기 단짝친구로 지내셨다. 고명순 할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는 동안 임용복 할머니는 틈틈이 식당을 일을 도우셨다고 한다. 일당으로 돈을 챙겨주려 하면 임용복 할머니는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친구 사이에 무슨 돈이냐 하면서. 그러다가 십년 전 고명순 할머니가 남편과 사별하게 되면서 혼자가 된 할머니 두 분은 본격적으로 식당일을 함께 하기 시작하셨다.

임용복할머니: 어느 날 가서 일을 했더니 돈을 줘. 아 근데 너하고 나하고 친군데 무슨 돈이냐. 안받는다 그랬어. 그랬더니 한사코 받으랴. 니가 와서 안하면 남이라도 다 주니까 받으랴. 친구지간에 조금 도와 준건데 무슨 돈이냐 그러는데 그래도 받으랴. 그래도 미안터라고. 그래서 함께 하기 시작했어. 이 친구가 나한테 너무 잘해. 조금만 일해도 돈도 많이 주고 미안해.

고명순할머니: 아녀 얘가 나한테 더 잘혀.
 
 
우정과 사랑 이것만 우리에게 있어 준다면 우리는 마술을 행할 수 있다.
'바그다드 카페'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나는 도로가에 있는 카페. 카페의 여주인 벤야민과 남편과 헤어져 홀로 여행을 온 자스민. 절망에 빠져있던 두 여인은 허물어져가는 카페를 깨끗이 단장하여 음식을 팔고 마술쇼를 하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그리고 카페를 찾는 외롭고 쓸쓸한 이들을 위로한다.

고산에서 경천을 지나 운주로 향해 구불구불 대둔산을 넘고 논산 대전으로 통하는 17번 국도. 이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일을 하고 그 와중에 이곳 오복식당에 들러 밥을 먹는다. 특히 고단하게 몸을 쓰며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곳을 많이 찾는다. 별다른 반찬은 없다. 그저 옛날 엄마가 해주던 별 것 아니던 밥상이다. 할머니 두 분은 늘 그렇듯 자기들 친 동생이 온 냥, 자기들 자식들이 온 냥, 옛날 엄마처럼, 친 할머니처럼 밥상을 차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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