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장미경의 삶의풍경

[장미경의 삶의 풍경] 고산에 고며든 맑눈광 선생님2024-04-18

[장미경의 삶의 풍경] 고산에 고며든 맑눈광 선생님

[장미경의 삶의 풍경] 고산에 고며든 맑눈광 선생님

[장미경의 삶의 풍경] 고산에 고며든 맑눈광 선생님


고산에 고며든 맑눈광 선생님 이야기

고산고등학교 오세강 선생님

 

그동안 내가 만난 선생님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생애 첫 선생님이었던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 얼굴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유난히 무서웠던 선생님의 얼굴도 어렴풋이 떠오르고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난 교생선생님을 떠나보낼 때 015B이젠 안녕을 함께 부르며 통곡하는 아이들을 따라 억지 눈물을 흘렸던 것도 생각난다.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늘 선생님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던 아이였는데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나는 선생님의 얼굴이 있다. 그때는 숙제 검사받듯 일기를 검사받던 시절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주시곤 했는데 그 선생님은 늘 일기에 댓글을 달아 주셨다. 선생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눈도 못 맞추면서 일기장으로 주고받는 그 짧은 댓글들이 재미있어서 때로는 시험문제를 쉽게 내주세요’,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애들이 약한 애를 괴롭히지 않게 해주세요같은 일기를 가장한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삐뚤빼뚤 써 내려간 어린아이의 시시콜콜한 하루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손톱만큼 작은 글씨에 마음을 담는 분이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너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그 한 줄의 댓글은 어쩌면 글을 쓰며 살아가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최초의 빛나는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존재는 그러하다.

 

처음부터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제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정말 못했어요. 친구들이랑 게임하고 야자 튀고 놀기만 했어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중요했어요.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사범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한자 자격증이 있었어요. 원래 이과였는데 한자 자격증으로 한문교육과로 진학하게 됐죠. 사범대 한문교육과에 진학하고 나서도 그냥 열심히 놀았어요. 동기 중에서도 술을 제일 잘 마셨고 많이 마셨죠. 학생회 활동하면서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났고 사람들에게 많이 배웠어요. 저한테는 그게 공부였던 것 같아요.”

 

고산고등학교 오세강 선생님은 30대 중반의 8년 차 교사다. 어렸을 때는 인사성은 밝았지만 장난이 심했고, 공부는 못했지만 한자를 좋아했고, 사범대에서는 교사 시험 준비보다는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한 덕에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대학시절 방학 때가 되면 순창 쌍치에 있는 훈몽재에서 좋은 선생님 밑에서 한문공부를 하며 세상과 삶에 대한 이치를 배웠다. 그렇게 흠 없이 착하고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군산 금강중학교에 발령받아서 처음 교사생활을 했어요. 교사 일이년 차 때는 좋은 교사가 되려고 하는 가면을 썼던 거 같아요. 좋은 교사는 이래야 해라는 가면을 썼던 거죠. 좋은 교사는 무조건 아이들을 수용하고 무조건 친절하고 무조건 화내지 않는 교사, 그런 모습을 이상적인 교사라고 생각했고 성직자로서의 교사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언제 깨졌냐면 아이들과 밀접하게 만나면서 아이들이 금방 알더라고요. 그것이 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매년 마지막에 아이들에게 익명으로 설문조사를 받아요. 물론 저를 좋게 이야기해주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충격적인 네 글자가 쓰여 있었어요. ‘화좀내라’. 어떤 친구는 가식적이다.’ 그러니까 제 마음은 천사같은 교사가 될 거야 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 표정은 그게 아니었던 거죠. 아이들은 못 속여요. 진짜 잘 알아요. 이 사람의 마음이 진짜 무엇인지. 그때 충격이었죠.”

 

감정을 숨기고 무조건 착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주변의 선배 선생님들 덕에 초임시절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었다.

 

진솔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화가 난다면 화를 잘 내는 방법이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싸우는 게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들에게 잘 싸우고 화해하는 방법을 알려줘야 해요.”

 

선생님은 그렇게 군산에서 6년 동안의 초임 교사생활을 마치고 20233월 고산고등학교로 오게 됐다.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선생님들이 온통 마음을 써주고 대안교육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잘 성장하고 잘 크는 그런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과 생각의 끝에는 작은 시골마을의 고산고등학교가 있었다.

 

저는 회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산고에 와서는 회의가 정말 많아요. 회의를 정말 많이 합니다. 군대로 치면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장경덕 교장 선생님께서 2019년 겨울쯤에 고산고에 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죠. 그때 이미 군산 청소년 자치배움터에 발령이 나기로 결정이 되어있어서 못 갔지만, 그 뒤로 계속 고산고에 관심을 기울이며 지켜봤는데 이렇게 오게 돼서 너무 좋았어요. 고산고와 고산 지역 공동체, 마을이 서로 연계된 것도 알고 있었고요. 저는 고산고가 교육계의 보물이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고산고는 소중한 학교 공동체죠. 주변 분들이 가끔 고산고는 어떠냐고 물어보시면 모든 학교가 고산고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아직 젊은 오세강 선생님은 나이가 들면 어떤 선생님이 되어 있을까를 늘 생각한다고 한다. 지금은 아이들이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 양파쿵야(넷마블 캐릭터)라고 부르며 많이 좋아해 주고 함께 잘 노는데 내가 과연 오륙십대가 되어서도 아이들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를 하루에도 두세 번은 생각한다고 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진짜 내가 솔직하게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때 가장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아이들이 저를 맑눈광, 양파쿵야 라고 불러요. 웃으면서 팩폭한다고요. 화내거나 혼내지 않았는데 혼나는 느낌이 든다며 붙여준 별명입니다.

고산고의 엄청난 강점이 뭐냐면, 2년 전에 저 포함해서 여섯 명의 선생님이 발령났었는데 저 빼고 다른 분은 고산고를 모르고 오셨는데 기존에 계셨던 고산고 선생님들의 환대와 함께 하는 문화에 금방 젖어들게 되더라고요. 한번 들어오면 못나가는 것. ‘고며든다는 말이 있어요. 얼마 전에 새로 오신 선생님 두 분도 그렇게 고산고에 스며들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내가 만난 오세강 선생님은 광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 맑은 눈을 가졌다. 그 맑은 눈으로 앞으로 펼쳐질 교사생활 내내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과 가치 있는 삶을 가르쳐 주실 거다.

맑눈광이라는 그의 별명 때문일까. 늘 마음에 새기는 사자성어 또한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을 늘 생각합니다. 선생으로만 잘하는 것보다 우선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좋은 교사가 될 수 없겠더라고요. 선생 따로 저 따로 인 채는 살 수 없을 거 같아요. 이 교육공동체 안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 글·사진=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도자기도 의식주도 자급자족하는 도공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