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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면 화정마을 최은주 할머니 이야기2024-02-02

고산면 화정마을 최은주 할머니 이야기

고산면 화정마을 최은주 할머니 이야기



한번 사는 인생, 유쾌하게 가는 거야.

-고산면 화정마을 최은주 할머니 이야기

 

사람을 만날 때 그를 이루고 있는 여러 성분들을 떠올려 본다. 떠올린다는 것은 생물학적 요소를 분석한다기보다 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는 행위와 같다. 켜켜이 쌓인 비슷한 띠의 모양 속에서 옹이를 발견하고 그 옹이로 인해 변형된 모양을 들여다보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주 쓰는 단어, 자주 짓는 표정, 웃음소리, 걸음걸이, 뒷모습 등을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용하게 들여다본다. 그러다보면 그에게 감응되고 마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행위가 상대를 이해하는데 좋은 훈련이 되어왔다.

 

화정리 골짜기에서 50년을 넘게 살아가고 있는 최은주(48년생) 할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조용히 들여다보고 말 것도 없이 그의 이야기에 압도되어 어느 순간 학교를 가고 싶던 십대시절 그의 곁에 앉아 있기도 하고, 생강을 이고 지고 고개를 넘던 서른 살 무렵의 그의 곁에서 함께 걷기도 했다. 이야기가 생생해서 그 시절의 소리와 냄새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학교 가는 아이들이 뛰어가면 찰랑찰랑 소리가 났어. 그 소리가 참 부럽더만. 책이랑 필통을 책보로 싸서 옆구리에 딱 메고 뛰어가면 필통 속 연필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 봄이 되면 소풍간다고 날라아 새들아 푸른 하늘을노래를 부르면서 줄을 서서 가는데 내 나이 여든이 다 되가는데도 그 노랫소리랑 찰랑찰랑 소리가 가슴에 남아있네. 학교 가는 애들을 하염없이 바라만 봤지. 우리 집이 가난하진 않았어. 할아버지도 학자였고 배운 집이었지. 위로 언니가 있었는데 그 당시 여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면 많이 배운 거지. 근데 전쟁 통에 좀 안 좋게 되니까 할아버지가 기집애들은 절대 배우면 안 되고 집에서 살림만 하라고 해서 내가 희생양이 된 거지.”

 

최은주 할머니는 익산 왕궁면 덕동마을에서 태어난 후 삼례 우석대 아랫동네로 이주해 21살 결혼 전까지 삼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다니진 않았지만 기죽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날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한다. 작년 여름에는 유년시절 어울려 놀던 친구들과 60년 만에 처음 만났다고 한다.

 

나는 큰 애기들 연애편지 심부름을 주로 했지. 삼례에 가설극장이 있었는데 오빠들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고. 그때 함께 놀던 친구들 두 명을 올 여름에 만났어요. 처녀 때 헤어진 이후로 일흔이 넘어서 처음 만난거지. 삼례 살 때 우리가 어떻게 놀았냐면 밤에 내가 장화신고 남의 미나리 밭에 들어가서 베어다가 삶아서 무쳐서 함께 먹고 옥수수밭에 들어가서 서리해 먹고 보리민대(보리이삭을 골라 불에 그슬린 후 뜨거운 이삭을 손바닥에 비벼서 후후 불어낸 것)해서 먹던 것들을 애들이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더라고. 은주 네가 해줘서 너무나 좋았다는 말을 60년이 지나서 들었지. 나는 촌에 살고 이렇게 풍신나게 사는데 서울 사는 너희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지. 그런데 시골 사는 내가 제일 재미있게 살더라고. 서울 사는 친구들도 참 좋아보인다 그러더라고. 내 사는 인생이 감사하게 느껴지더라고.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은주 할머니의 사남매 출산한 이야기는 여느 무협지의 영웅담 못지않다. 첫째 딸은 한동네 사는 동서가 받아 주었는데 둘째 딸과 셋째, 넷째 아들은 은주 어르신 혼자 낳고 스스로 탯줄도 잘랐다고 한다. 딸만 내리 둘을 낳았을 때 옆에서 시어머니가 서운해 하자 어머니 자식 아니고 내 자식이니까 미워하지 말라당당하게 선언을 하기도 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며느리 기를 죽이려 담뱃대로 머리를 때리려 할 때는 그것을 확 낚아채 뚝 끊어버리기도 했다.

 

나도 우리 집에서는 귀한 자식인데 왜 욕하고 때리냐고 대들었는데 경우 없이 대들진 않았어. 어머니도 싫진 않았는지 궁시렁 하면서도 매일 우리 집에 오셨어. 애들도 좀 봐달라고 하면 못 봐 이년아!’ 하면서도 다 봐줬어. 나 모심으러 어디 논에 가 있으면 아기 젖먹이라고 안고 오고 그랬지.”

 

은주 할머니는 모든 자녀들에게 미안하지만 세 살도 안 된 막내아들 떼어놓고 돈 번다고 길을 나서던 때가 마음에 사무친다고 한다.

 

어린 것 떼어놓고 생강 장사 다녔는데 못내 마음이 아파. 돈 조금 벌겠다고 엄마 노릇을 못했어. 봉동 생강을 전국으로 팔러 다녔지. 이 일대 사람들은 생강으로 살림이 좀 폈어. 영광 해리, 구시포, 법성포, 여수 안 가본 데 없이 팔았고 주로 여수에서 많이 팔았어. 내가 서른 살 무렵 그러고 돌아다닌 거야. 그 당시에는 차가 없으니까 사람이 이고지고 걸어다니면서 팔았지. 일단 생강만 차편으로 여수에 보내놓고 우리 동네에서는 4명이 같이 버스를 타고 여수로 가. 그럼 먼저 도착한 생강을 나눠 짊어지고 2명씩 흩어져서 팔러 다녔어. 여수 시골 마을의 집집마다 걸어 다니면서 파는 거야. 곡식으로 주면 교환하기도 하고 돈으로 줄 때가 제일 좋지. 여수 쪽에서는 생강을 팔았고 완주 쪽에서는 주로 채반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았어. 보따리 장수마냥. 어느 마을에 갔다가 해가 지면 혼자 사는 할머니집을 수소문해서 하룻밤 자고 가고 보리밥도 얻어먹고 다니고 그랬지. 참 희한한 풍경이었지. 요즘처럼 가게가 한집 건너 하나 있는 거도 아니었고 여관이 흔하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낯선 우리를 선뜻 재워준 그 사람들 축복받아야 혀.”

 

할머니의 노동연대기는 마을의 품앗이 노동에서 시작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낯선 산을 넘어 두발로 걸어 나갔다. 도시에 공장이 생기자 두려움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속옷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91년에는 용진의 맥주공장에 취직해 2015년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그 사이 한글도 배워 면사무소나 은행에서 이름 석자 당당히 쓸 수 있게 되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을 돌보면서도 쉬지 않았다. 병원 5층 건물을 청소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20분을 걸어 첫차를 타고 용진에 내린 후 자전거를 타고 전주 송천동으로 출퇴근을 했다. 집 근처 축사에서도 일을 했다. 저마다 짧게는 7년에서 9년을 꽉 채워 일을 했다.

노동으로만 꽉 채워진 인생이 어디있겠는가. 할머니는 노는 것도 꽉 채워 놀아야 한다는 멋진 철학을 지닌 어른이다. 한때는 화정리 골짜기 언니들과 어울려 양말이 닳도록 두 발을 비비며 춤추고 놀기도 하고 지금은 주로 두 발로 폐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탄다. 집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이 왠지 답답한 은주 할머니는 오전에는 반드시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면 어김없이 화정리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한때 화정리 골짜기를 들어다 놨다 하던 그 시절의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궁핍한 삶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그 길을 홀로 결연히 걸어가는 것 보다는 함께 걸어갔던 이들. 언제든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사람. 최은주 할머니 같이 늙어가고 싶다.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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