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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면 이순자 할머니 이야기 2023-12-21

고산면 이순자 할머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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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면 이순자 할머니 이야기

고산면 이순자 할머니 이야기

나를 살게 하는 힘  


이순자(42년생) 할머니는 고산 토박이다. 자포리에서 태어나 바로 옆 마을 상리로 시집을 왔으니 고산 소재지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5남매 중 위로 오빠가 둘, 아래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가 있었고 어린 시절은 시망시러운 아이였다고 기억했다. 시망시럽다는 말은 몹시 짓궂은 모양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다. 큰 오빠는 점잖고 무서워서 잘 따르지 않았지만 둘째 오빠와 그 또래 남자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제법 성가시게 굴고 짓궂게 놀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때는 자포리 근처가 다 논이었어. 지금 고산 어린이집 있는 데가 우리가 놀던 논이었어. 옛날에는 어른들이 논에다가 일부러 물을 대줬어. 동네 애들 놀라고. 그 논바닥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고 팽이치기도 하고 그렇게 놀았지. 아직도 그때 놀던 때가 눈에 선해. 언제 이렇게 나이가 먹었나 한심하지. 우리 집은 가르칠 형편은 되었는데 여자들 교육을 안 시켰어. 사흘을 굶었는데도 중학교를 안 보내주더라고. 그러면 양장기술이라도 배울테니 기술학교를 보내주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 해줘. 여자가 많이 배우면 시집가서 오래 못 산다고. 그래서 그냥 놀다가 나 열여섯 살 인가 그때 우리 윗집에 미장원이 생겼어. 거기 놀러 다니며 왔다갔다 하니까 미장원 언니가 나보고 시다(보조)를 해달라고 하더라고. 그 당시만 해도 미장원에 사람이 많으니까 일손이 부족하잖아. 그때는 숯을 이용해서 불파마를 했어. 그렇게 미장원에서 보조를 하다가 일찍 연애를 했지.”

 

그 시절 함께 어울려 다니던 또래 친구 다섯이 있었다. 후레시(렌턴)도 없던 시절이어서 호롱불을 들고 참외 서리하러 다니고 새벽이면 감 따러 다니며 그때도 제법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그 시절에 아저씨를 만났다. 그 아저씨는 다섯 친구들 중에서도 유독 할머니에게 눈깔사탕도 사주고 사이다도 사주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보였다고 한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상스럽게 우리 아저씨한테 끌리는 거야. 우리 아저씨도 나한테 끌리고. 그러다 봉게 밤이 되면 둘이 만나는 거야. 저녁에 달이 밝으면 방천으로 돌아다니고 그랬지.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안 보면 보고 싶어. 나 사는 집 앞에 자포똘이 있었는데 우리 아저씨가 똘 건너 제재소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어. 어느 날은 봉동에서 영화를 한다고 영화 보러 가자고 그러더라고. 밤에 걸어갔지. 그때는 차가 없으니까. 영화 보고 그 밤에 집으로 걸어왔지. 3년을 그렇게 지났어도 내 손을 한 번 안 잡았는데 그 날은 나보고 집에서 자고 가라고 그러더라고. 그 당시 내가 집에서 나와서 미장원에서 언니랑 지내고 있었거든. 막 못 가게 혀. 하루는 별일 없이 잠만 자고 갔는데 나중에는 서로 좋아하니까 일이 생긴 거지. 그때가 9월 무렵이었던 거 같아. 무수가 당긋당긋 있을 때야. 그때 우리가 밤에 걸어오면서 목이 마르니까 그걸 뽑아먹고 걸었지. 그렇게 애가 먼저 들어선 거지.”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좋아하던 아저씨를 만나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 낳고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았으면 참 좋았으련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울다가 웃다가 두 시간을 보냈고 구술을 풀면서 또 울다가 웃다가 세 시간을 보냈다. 영리하고 부지런했던 할머니의 친정아버지는 딸의 상황을 말없이 받아들이셨지만, 어머니와 오빠들은 반대가 심했다. 고산에서 책방하던 큰 오빠가 할머니를 앉혀놓고 정말 결혼을 할 거냐고 세 번을 묻고 기어이 시집을 가겠다고 하니 펑펑 울면서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19살 되던 해 둥실하게 부른 배를 안고 시집을 갔다.

 

나 산 거 생각하면 기가 막혀. 시어머니랑 나랑 신랑이랑 셋이 살았어. 처음 시집와서 살았던 곳이 여기 길가에 자전거포 있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오막살이를 했지. 다행히 시어머니가 좋은 분이어서 시집살이라는 건 몰랐는데 배고픔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 그 배고픔이 참 서러웠지. 우리 아저씨가 나름대로 일을 하긴 하는데 억척스럽지 못했어. 지금도 우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 아이들 데리고 친정에 가면 나만 보면 밥을 먹으랴. 두 시에 가나 열 시에 가나 밥 때도 아닌데 밥을 먹으랴. 그럼 나는 거짓말로 밥 먹었다고 하지. 그럼 아버지가 아기 엄마는 애 젖 주고 나면 금방 배가 고파진다더라. 그러니 먹어라.’ 그런 소리를 늘 하셨어. 아버지는 왜 나만 보면 밥만 먹으라고 그러는지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힌 소리였지. 내가 궁핍하게 사는 것을 숨긴다고 숨기지만 아버지는 다 보이는 거지.”

 

순자 할머니가 어린 시절 귀찮게 따라다니던 작은 오빠는 오두막집에 종종 찾아와 배곯지 말라며 쌀이고 돈이고 많이 보태줬다고 한다. 친정식구들 덕에 매서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술을 좋아하던 할아버지는 마흔이 넘어서야 마음을 잡고 일을 하셨다. 동네에서 일 잘한다고 소문이나 이집 저집 불려 다니며 농사일을 하니 그 덕에 살림살이도 조금씩 좋아졌고 가을과 겨울철에는 대추와 곶감으로도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마흔일곱부터 12년 동안 전주에 있는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을 했다.

 

예전에는 대추장사 하면 돈 벌었어. 그 당시 고산에는 대추나무가 별로 없으니까 대전, 운주, 화산에서 대추를 사서 강변에서 말렸어. 멀리 강원도에서 대추 사러 사람들이 고산까지 찾아왔어. 나는 오산리 강변에서 말렸어. 벌건 대추를 강변에 널어놓았으니 참 장관이지. 일하는 사람들도 또래에다가 여자 남자 섞여서 참 재밌게도 일했지. 나중에는 공장으로 출퇴근을 했지. 아저씨가 반대해서 일을 잘 못 나갔는데 월급봉투에 20만원을 받아서 아저씨한테 보여줬지. 첫 월급으로 구두를 맞춰줬는데 그 뒤부터는 일을 나가게 해주더라고.”

 

할아버지는 17년 전 일흔여섯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폐병으로 고생하시던 시절에도 대전사는 아들이 아버지를 모셔가 병원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병원비에 보태라고 자녀들이 돈을 주는데도 순자할머니는 받을 수 없었다. 가난 때문에 일찍 집에서 떠나보냈다. 그들이 도시로 떠나 공장에서 번 돈을 차마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잘 커 준 자녀들에게 늘 고맙다고 한다.

 

애들이 나한테 봉투에 돈을 넣어서 준다고 해도 나는 안 받았어. 애들이 삐직삐직 울면서 엄마는 어째서 우리 돈을 이렇게 안 받으려고 하냐고 그랬지. 근데 지금은 받아. 주면 받지~”

 

순자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월급봉투를 아마 한참동안 어루만졌을 것이다. 스스로 일해서 돈을 벌었던 그 세월이 할머니를 살게 했다. 시망스러웠던 어린 순자는 고산 부녀 경로당의 회장이 되었다. 나의 오랜 산책길에서 만난 고산의 할머니들이 경로당에 다 모여 계신다. 함께 밥을 해먹고 웃고 떠드는 순간들이 지금의 순자 할머니를 살게 하지 않을까!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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