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23] 백화주(百花酒) 사랑 고백2023-11-28
백화주(百花酒) 사랑 고백
봄부터 겨울까지 백 가지 꽃을 말려두었다가 백화주를 빚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 준 백 번의 기쁨을 모아 술잔에 담아내는 사랑 고백의 절정이다. 어여쁜 꽃을 볼 때마다 느낀 기쁨을 술 속에 담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라고.
아내는 해마다 누에를 쳐 비단을 만들고 백 가지 꽃으로 술을 빚어 나에게 주었다.
이백 년을 거슬러 날아온 사랑 고백으로 나는 읽었다. 백 가지 꽃이 어우러진 향이 담긴 술잔을 아내로부터 받아든 남편의 다정한 눈빛이 이 한 줄에 묻어난다. 대를 이어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고, 집안에 수천 권의 책을 보유한 명문 사대부가의 장남이었던 서유본(1762~1822)은 아내 빙허각 이씨(1759~1824)를 세상에 자랑하고픈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아내 자랑이나 하는 팔불출이라 각오하고 말이다.
겨울에 매화, 동백으로부터 이듬해 가을 국화까지 꽃을 모으되 꽃술 없이 하지 말고 그늘에 말려 각각 봉지를 지었다가 중양(9월9일) 때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면 술을 빚으라. 다른 꽃은 향기가 많다가도 마르면 향내가 가시나 국화는 마른 후 더욱 향기로워 주장을 삼고, 복사, 살구, 매화, 연꽃 등과 초화에는 구기, 냉이꽃 등 성미가 유익한 것은 돈수를 넉넉히 하고 다른 꽃은 각각 한 돈씩 하되, 왜철쭉, 옥잠화, 싸리꽃은 지독하니 넣지 말라.
빙허각 이씨가 철마다 피는 꽃을 다뤘던 방법이다. 꽃을 어떻게 말리고 보관하는지, 어떤 꽃을 쓰는지, 쓰면 안 되는지, 술의 맛과 향을 조화시키기 위해 어떤 비율로 꽃을 써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세세히도 적어 놓았다. 여성이란 현모양처의 미덕만 갖추면 되었던 시대에 빙허각은 옥사에 휘말려 단숨에 몰락한 가문의 생계를 직접 농사를 지어 떠맡으면서도 밥 짓고 반찬을 만드는 틈틈이 사랑방에 나가 옛글을 읽었고, 일상생활에 아주 요긴한 말을 가려 자신의 소견을 덧붙이고, 여러 책에서 뽑아 항목별로 나누어 기록했다. 남편 서유본은 술빚기, 장담그기, 옷 만들기, 염색, 길쌈, 누에치기, 농사와 가축 기르기 등 아내가 분류한 항목에 관련된 서책을 찾아다 주며 아내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리고 규방에서 알아 두어야 할 상식을 모았다 하여 아내의 책에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라 이름 지어주고 이렇게 서평을 남긴다.
나의 아내가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서 각각 항목별로 나누었다. 산에 사는 일용의 살림살이에 요긴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풀, 나무, 새, 짐승의 성미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다.
중년에 들이닥친 집안의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삶을 이롭게 하고자 연구하고 기록했던 빙허각 이씨는 그녀의 나이 50세에 <규합총서>라는 찬란한 기록을 완성했다. 서유본의 서평은 아내의 열정과 노력에 대한 칭찬과 격려였다. 표지에 떨리는 붓끝으로 제목을 써놓고 두툼한 책 묶음을 바라보며 부부가 마주 앉아 백화주를 나누는 풍경을 상상해 본다. 술잔에 퍼지는 백 가지 꽃향기만으로도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이 되어주지 않았겠는가.
/유송이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