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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억마을 강옥선 할머니 이야기2023-09-20

두억마을 강옥선 할머니 이야기

두억마을 강옥선 할머니 이야기

두억마을 강옥선 할머니 이야기

두억마을 강옥선 할머니 이야기



사진설명_ 옥선할머니와 복덩이, 가지고 가라며 텃밭의 작물들을 서둘러 갈무리하시는 옥선 할머니와 할머니 밭에서 나고 자란 것들. 



헛소리에는 옳은 소리로 말대답을 해야 하는 법


두억마을 강옥선 할머니 이야기

 

강옥선 할머니집 앞마당 텃밭에는 아기배추가 자라고 있다. 아기 배추들 옆으로는 고추, 부추, 가지들이 줄 지어 있는데 어린 배추들 한 가운데 붉은 꽃무릇 한 송이가 홀로 피어있다. 할머니가 심은 거냐고 물으니 모르겠다 하신다.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르지만 꽃이 고와서 뽑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이라 한다. 초록 배추들 사이에 단연 돋보이는 꽃이다.

할머니는 13살에 일본 오사카에서 날아와 이곳 두억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여전히 환하고 생생하게 피어있다. 할머니의 부모님은 일제강점기 때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보통사람이었다. 가족이 일본 오사카에 이주한 뒤, 1934년에 할머니가 태어났다.

 

저녁에 자려고 누어서 기와집을 지었다 부셨다 함서 어렸을 때부터 지금부터 산 삶을 생각하는 거지. 말하자면 하나부터 쌓아 올려가며 기와집을 짓듯이 생각을 쌓는 다는 거야. 겁나게 오래 살긴 했는데 좋은 세상은 못 살아 본거 같아. 지금이야 아들 딸 여위고 편하지. 딸들이 다섯인데 나에게 참 잘해. 이게 행복인가, 호강인가 싶다가도 허무하지.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우리는 앞으로 죽을 일만 바라보고 살잖아. 그러니까 참 허무하기도 해.”

 

일등은 가질 수 있어도 반장은 가질 수 없었어.

할머니의 아버지는 아들, 딸 차별 없이 자식들을 퍽이나 아끼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리하다고 소문이 나서 딸자식이어도 공부만 계속 하겠다 하면 동경으로 유학을 보낼 테니 덮어 놓고 공부만 하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올 때도 나는 가르칠 것 없이 영리하다고 칭찬을 많이 하셨어. 공부를 잘 해서 반장을 하고도 남았어. 일등을 하고 반에서 주동역할을 해도 반장은 안줬어.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내가 12살 먹었을 때 어느 날, 일본애하고 나하고 말짓을 해서 선생님한테 불려가서 혼이 났어. 그때 내 일본이름이 하라모도였는데 선생님이 일본애한테만 그러시더라고. ‘하라모도 상은 일본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지만 너는 일본인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 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딱 상하더라고. 도무지 학교를 갈 수가 없어. 차별한 거잖아. 나는 눈치가 빨라서 도무지 그런 소리를 듣고는 다시 학교를 돌아갈 수 없었어. 그렇게 12살 중간에 학교를 안 갔고 다음 해 13살 때 온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왔지. 시국을 잘 못 만났지. 좋은 세상에 살았더라면 배움의 끝이 없이 배웠을 테지.”

 

해방이 된 후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은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다행히 주변의 좋은 이웃들이 보살펴 줄 테니 돌아가지 말고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한국인들에게 보복하는 일들이 발생하면서 계속 머물 수 없었다. 어려운 시국이었다. 13살 되던 해에 고모가 살고 있는 경상남도 함양으로 온 가족이 돌아왔지만 그곳에서는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그까짓 소문이 밥먹여 주나요

그의 아버지가 먹고 살 길 찾아 떠돌다 찾아낸 일이 산판일이었다. 그렇게 김제 금산사 근처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먹고 살 일이 급하니 배움을 이어나갈 순 없었지만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산다는 아버지 말에 그는 누에를 쳐서 길쌈하고 베짜는 일을 배웠다. 그럭저럭 살다보니 17살이 되었고 그 해에 6.25전쟁이 터졌다. 남자들은 다 잡혀가고 여자들만 마을에 남았다. 귀하게 키운 딸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안동김씨 집성촌인 김제 동곡마을로 급하게 시집을 보냈다. 18살에 시집와서 석 달도 못 채우고 남편은 징집되어 7년 동안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나하고 시어머니랑 둘이 그 세월을 산거지. 어느 날은 마을 반장이 추렴(모임, 놀이, 잔치 등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럿이 얼마씩 돈이나 물건 등을 나누어 내거나 거둠)을 내라네. 여자들 둘이 사는데 무슨 돈이 있어 추렴을 내냐고 소리를 지르니까 반장이 장부를 탁 내려놓으면서 당신이 그럼 반장 하시오!’ 그러네. 그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는데 통도 크지. 나중에 반장이 면서기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어. 내가 문을 활짝 열어놓고 큰 소리로 여자 둘만 살고 남편은 군대로 끌고 갔는데 돈 되는 거 있으면 다 가져가시오큰 소리를 치니까 다 큰 남자들이 쩔쩔 매. 대통령이라도 데려오라고 그랬어. 나는 하나도 겁 안 난다고. 여자 둘만 있으니까 별일이 다 있었어. 수리조합 때문에 물을 막으면서 우리 집이 잠기게 되어서 집값으로 그때 돈 2만원을 받아두었지. 안동김씨 대부라는 사람이 와서는 선산에 비석을 세워야 하는데 그 돈을 내놓으라는 거야. 내가 절대 그 돈에는 손 못 댄다고 말대답을 하니까 그 양반네들이 어디서 저런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왔냐며 펄쩍펄쩍 뛰어. 시어머니도 집구석 망해먹을 여자라 통머리만 커서 뭐시고 일만 벌인다고 뭐라고 했지만 나는 기가 안 죽어. 베 짜서 번 돈으로 돼지랑 닭을 키우면서 살림이 나아지니까 뒤에서 험담하던 동네 사람들도 똑똑한 며느리 참 잘 들어왔다는 말을 했지.”

 

그의 나이 스무 살. 마을에서 최초로 쪽진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마를 하고 나타났을 때도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 안 좋은 소문이 나돈다고 시어머니는 걱정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큰 소리 쳤다. “내 머리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잘못입니까! 소문내려면 내시오. 소문이 밥 먹여 주나!” 이 대목에서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지켜내고 스스로 삶을 살아낸 사람에게 보내는 갈채였다.

 

군대에서 돌아온 남편과 시어머니, 돌 지난 첫째 딸을 데리고 시아재가 살고 있는 두억마을로 이사를 결정했을 때도 그는 서울로 가길 원했다. 그 당시 시골 형편은 어딜 가나 힘들었을 테고 서울로 가면 장사라도 해서 집안을 일으킬 자신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어떻게든 설득이 됐지만 남편은 굳건했다. 먹고 살기 위해 나섰던 그 길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할머니는 울근 감 두 접을 머리에 이고 두억마을에서 초포다리까지 걸어가던 그 길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전주 중앙시장, 모래네 시장, 덕진공원에서 수줍게 감을 팔던 새색시는 사납고 억척스러워야 했다. 자식들 대학등록금을 벌기 위해 쉰 살 무렵에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청량리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중곡동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반찬을 팔았다. 안 해 본 일 없이 다 해봤다는 말이 그 세월을 대신을 할 수 있을까? 꽃피는 봄이 온 줄도 모르고 낯선 곳에서 버스를 타고 장사 하러 돌아다닐 때, 울긋불긋 고운 옷을 입고 봄소풍 가는 사람들을 보고 서럽게 울던 그 울음은 왜 지금도 그리 생생한지 모르겠다 하신다.

 

명랑하고 똑똑하던 어린 옥선, 허튼 소리에는 눈 똑바로 뜨고 옳은 소리로 맞받아치던 열아홉 옥선, 자식들 호미자루 쥐는 것이 싫어 돈 벌러 도시로 떠났던 쉰 살의 옥선. 이 모든 옥선을 기억하기 위해 강옥선 할머니는 오늘 저녁에도 세월의 기와집을 지었다 부셨다 하실 테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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