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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동 임거마을 이민철 이야기2023-08-29

봉동 임거마을 이민철 이야기

인생은 어쩌면, 함께 잘 놀다 가는 것


이민철(67년생)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물줄기는 대학 시절에 접했던 풍물을 시작으로 봉동지역의 농악과 우도농악을 접했던 이야기로 이어졌고 생강에 이르러서는 토양과 물, 생강풀, 온돌식 저장굴과 같은 전통농업시스템에 대한 다른 줄기들로 뻗어져 나갔다. 곁에 앉아 있던 친구분은 이 친구 인터뷰 하려면 3일도 모자랄 판인데라고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이민철씨는 봉동 토박이다. 봉동읍이 우동과 봉상으로 나뉘어 있던 시절을 기준으로 보면 봉상이 고향인 그는 대학을 다니던 시절을 빼곤 이 지역을 떠나서 산 적이 없다고 했다.

 

모든 일은 농악에서 시작된 거 같아요. 85년에 대학에서 풍물을 배우고 이듬해에 동네 어른들이랑 농악을 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박은 맞는데 느낌이 다른 거예요. 도대체 이 다른 호흡이 무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었죠. 2004년에 후배가 마을민속조사를 하는데 협조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어른들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나는 학교라는 틀 속에서 농악을 배운 거고 어르신들은 삶의 현장 속에서 어깨너머로 두레하면서 몸에 밴 농악이었던 거죠. 그분들은 악기를 제대로 다룰 줄은 몰라도 알고는 있어요. 누구 빈 자리가 있으면 언제든 껴서 흉내는 내요.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러다 농사도 짓고 농민회 활동도 바쁘고 해서 기록하는 것은 중단했었는데 지금 주유소일 시작하면서 다시 기록하는 일을 이어나갈 수가 있었어요.”

 

농악은 농부들이 일을 할 때 두레를 짜서 연행하는 음악이다.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을 테니 아주 오래된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 농악으로 인해 이민철씨는 과거로부터 전해지던 기세배놀이하는 절차, 꽹과리 구음으로 알려주었던 것들을 알고 싶었다. 다른 전문가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녹취했던 마대자루 5개 분량의 테이프을 다 듣고 기록해도 원하던 답을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역과 마을에 대해 스스로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7~8년 되는 것 같아요. 그 증언을 남겨놓지 않고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사라지는 이야기들이죠. 근데 참 안타까운 것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질문하고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빠지는 부분이 있어요. 다시 듣고 싶어서 찾아가면 돌아가신 분들이 계셔서 안타까울 때가 많죠. 봉동의 생활사, 봉동의 정체성, 사람들의 삶과 연관된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글재주가 한계가 있다 보니까 일단 기록을 해나가는 거죠. 그렇게 17년 정도의 기록이 있어요. 2004년도부터 아날로그 때부터 기록이 있어요. 지금은 모두 하드디스크에 담아 두었습니다.”

 

현재 이민철씨는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완주생강 전통농업시스템 보존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전통방식의 생강농업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함께 농업현장에서 함께 연구하는 협업농장 현판식을 열기도 했다. 그는 봉동 생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봉동생강이 좋았던 이유는이라고 과거형 표현을 사용했다.

 

봉동생강이 좋았던 이유는 이 지역이 산과 평야의 경계에 있어서 생강풀이라던지 생강에 필요한 자재를 산에서 바로 구하기 좋았고, 토양도 비옥하고 땅이 물빠짐이 좋아야 하는데 표토층 일 미터 아래는 모래자갈층이예요. 그리고 온돌식 저장굴 같은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전통농법이 있었고요. 그런데 1960~70년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질병이 왔죠. 아마도 전통농법이 갑자기 지금의 관행농법으로 바뀌면서 그런 일들이 생긴 거라고 봐요. 72년도 신문자료를 보면 생강농업이 적자다, 실의에 빠져서 농부들이 노름에 빠져 있다. 이런 기사들을 찾을 수 있어요. 그리고 나서 생강농사가 안되니까 하우스농업이나 특수원예로 싹 바뀐거죠. 전통농법을 4년째 하고 있는데 생태다양성이 중요해요. 생강밭에 천적들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죠. 관행농은 파종하고 그냥 지푸라기만 덮어 놓거든요. 근데 전통농법은 산에 가서 가을이나 봄에 둔덕을 만들고 고랑에다가 보리를 심는 거죠. 심어놓고 4월 말, 5월 초에 보리밭 사이에 생강을 파종해요. 그리고 5월 중순쯤에 산에 가서 새순이 나온 참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그걸 생강 파종한 곳 위에 덮어요. 그걸 생강풀이라고 해요. 그 뒤에 보리대를 끊어서 2차로 덮어주는 거죠.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강풀을 덮지 않으면 생강을 재배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해요. 그 정도로 생강풀이 중요했어요. 생강풀은 가지째 꺾는 것이 중요해요. 생강이 고온에 약한데 생강풀과 보릿대를 이중으로 덮어주면서 햇빛도 막아주는 거죠.”

 

봉동 생강이 아주 오랜 전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진 농산물이었고 그것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선조들의 지혜로운 전통농법이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그의 설명은 자연스럽게 만경강의 옛 물줄기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들과 함께 100년 전의 지적도를 조사해서 삼개월 동안 이어 붙여 만든 옛 물줄기 지도는 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아카이브이고 가장 창의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실제로 그가 보여준 하드디스크에는 지역의 생활사를 기록한 영상, 사진, 녹취록 등이 실로 방대하게 저장되어 있었다.

 

“1919~21년 사이에 대간선수로가 만들어지거든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1914~15년의 지적도를 찾기 시작한 거죠. 읍사무소 찾아가서 초기 지적도 찾아가며 확인했어요. 삼례에 모정이라는 박사님들이 있는 지적 아카이브에서 모아놓은 지적도도 참고했고요. 그걸 일일이 다 지도를 만들어 봤어요. 어우리에서 삼례까지 만경강 중심으로 다 이어봤는데, ! 정말 멋있더라고요.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잖아요. 지형의 변화를 보면서 이렇게 그분들도 많은 변화를 겪으며 살아왔구나. 물길을 개간하면서 돌을 골라서 한쪽에 쌓기 시작하면 뙤똥하게 돌무더기가 생겨요. 그런 걸 뙤똥배미라고 부르고요. 제방을 쌓으면 평야에서 언덕을 부수고 공사를 하면 부순배미라고 불렀던 거 같아요. 그렇게 정리하는 것들이 나름 의미 있는 작업이었죠. 그러면서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고 깊어진 거 같아요.”

 

이민철씨는 이 모든 것들이 농악으로부터 시작되고 확장된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농악이든, 두레든, 천렵이든, 농사든 마을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가락과 호흡이 있고 결국 그것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며 또 다른 변주를 만들어 간다고 했다. 그것들이 잊혀 지기 전에 찾아내서 기록하는 것, 또 그것들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나가는 것, 그것을 위해 이민철씨는 언제나 바쁘고 즐거워 보였다.

 

내가 재밌어야 해요. 술메기, 천렵, 전통농법 모두 다 섭렵해서 같이 노는 것. 어르신, 젊은이들 모두 모여서 함께 잘 놀기 위해 하는 거죠. 투박하지만 어르신들이 술메기 할 때 치는 가락들이 참 맛깔스러워요. 그걸 내가 흉내내보려고 하는 데 그 맛을 내기가 쉽지 않아요.”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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