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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마을 임영배 이야기2023-07-25

중리마을 임영배 이야기

척척박사 임박사의 파란만장 연대기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는 어학사전은 맨땅에 헤딩이라는 말을 무모한 일에 도전하거나, 타인의 도움이나 아는 것 없이 혼자서 일을 어렵게 해나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임영배씨(73년생)의 인생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을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예시가 될 수도 있겠다. 소양면 송광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해야 했던 종이장판 만드는 일을 거드는 것부터 가구공장 목수일, 슈퍼마켓 유통업, 덤프트럭 운전, 횟집 삐끼, 택배사업, 통신설비, 택시기사, 족발가게 운영 그리고 지금의 편백나무 가구전문 생산업체 나무다룸의 대표 까지. 그는 재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단 한 달의 쉴 틈도 없이 살아왔다.


 

용진 산정리가 고향인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소양 송광마을로 이사 갔어요. 아들만 4형제 중에 장남이었죠.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도왔는데, 종이 장판이라고 아세요? 그 당시 송광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종이 장판 만들어서 먹고 살았어요. 한지도 유명했고요. 새벽 두 시에 부모님들이 일어나서 종이에 풀칠을 해요. 어렸을 때부터 그 시간에 부모가 일하면 우리가 편히 잘 수가 없잖아요. 풀도 개어주고 짐도 같이 들어주고 학교 끝나면 집에 가서, 무나무(물나무)라고 종이를 널어놓을 때 짚어주는 집게가 있어요. 그걸 동네에서 직접 만드는 분이 계셨어요. 암튼 우리가 무나무 집게를 뽑으면 부모님은 뒤따라오면서 그 종이를 걷는 일을 했어요. 5톤 차로 한지를 몽땅 싣고 와요. 그럼 그걸 저장해놨다가 얇은 한지를 몇 겹으로 두껍게 풀칠을 하는 거죠. 한 장을 두 장으로 만들고 겹겹이 계속 붙이는 거죠. 그 두꺼운 거를 또 방아를 쪄야 해요. 두꺼우니까 납작하게 눌러주면 힘이 생기고 단단해지지. 납작해진 걸 콩기름에다 넣어서 말리면 장판이 되는 거예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일을 했던 거 같아요.”



한지로 종이 장판 만드는 일을 했던 송광마을 사람들은 제법 잘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임영배씨의 아버지는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4형제의 장남이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열일곱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갔다. 그가 취직한 곳은 세곡동 헌인마을에 있던 스타가구라는 공장이었다. 공장에 있는 작은 방에서 생활하며 5년 동안 일을 했고 돈도 제법 모았지만 아는 사람이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 바람에 모아둔 돈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부안 격포에 내려가서 친척 누나네 가게 일을 좀 도와줬어요. 제일상회라는 슈퍼마켓이었어요. 매형이 간암에 걸려서 힘들어 하실 때 누나 혼자 일하는 게 힘드니까 겸사겸사 내가 도와주러 간 거죠. 근데 그 당시에 큰 사고가 있었어요. 위도 페리호 사고가 난 거죠. 격포에서 가게를 했으니까 위도에 있는 구멍가게로 들어갈 라면이나 술 같은 걸 배에 실어서 보냈는데 갈 때는 잘 갔는데 그 배가 오면서 가라앉았어요. 나는 그 배에 물건을 실어만 주고 나오긴 했는데 그때 난리였어요. 그 조그만 동네에 차들이 너무 많이 들어오고, 사람 건져낸다고 배는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고, 헬기는 떠다니고, 무당들은 굿한다고 난리고 아무튼 엄청났어요. 그때 제 나이가 22살 때인가 그랬어요.”



그런 일을 겪고 그는 격포를 나와서 대형면허를 따고 덤프트럭 운전을 7년 동안 했다. 장수 번암면에 있는 동아댐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임막해하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무거운 흙을 싣고 급경사면을 오르내리는 위험한 일을 밥 먹듯이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댐 바닥의 흙을 퍼다 나르는 일을 했는데, 댐 밑바닥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후진으로 운전해서 올라가야 되요. 낭떠러지 같은 곳도 아슬아슬하게 운전하기도 하고. 흙을 부려야 하는 곳이 40미터 낭떠러지 같은 곳인데 그 끝 제일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서 흙을 쏟아내야 하거든요. 아마 지금도 트럭으로 후진해서 서울까지 가라고 하면 할 수 있어요. 덤프트럭 할 때 별명이 임막해였어요. 무식했던 거죠. 저렇게 목숨 걸고 무식하게 일하는 사람 없다고 그런 별명이 붙었어요. 끄터리까지 가서 흙을 부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요. 일을 선택할 때마다 스스로가 개척한 거에요. 원래는 처음 시작한 일과 연관이 되는 일을 선택하면서 살잖아요. 근데 저는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중요하니까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직업을 바꾸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그때그때 선택을 해야 했어요. 중학교만 졸업해서 그런지 주변에 인연들이 없었어요. 사회에 친구들이 많아야 일이 연결도 되고 도움도 받는데.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 살았어요.”



그는 개인 사정으로 덤프트럭 일을 그만두고 다시 격포로 가서 횟집 일을 시작했다. 슈퍼마켓을 하던 사촌 누나가 큰 횟집을 열었고 아직 이십 대 후반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인연이 닿는 데로 몸을 내맡기며 다시 격포로 온 것이다. 그러다 택배 사업도 한 4년 정도 하고 소형선박 자격증을 따서 낚싯배 운행도 했다. 그렇게 격포에서만 17년 정도를 살며 청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 전주로 와서 인테리어 회사를 다녔어요. , 상가 수리일을 했죠. 7년 정도 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웠고 그 기술로 인해서 지금까지 먹고 살았고 또 이 일도 할 수 있는 거죠. 주변 사람들이 그래요. 나랑 김병만 둘을 정글이든 어디든 던져놓으면 어떻게든 먹고 산다고. 8월이 되면 내가 사업자등록증 낸 지 2년째가 되요. 내가 이 회사 인수할 때만 해도 유통회사로 한 달에 제품이 100개씩 나갔는데 그때 계약했던 유통회사가 빠져나가면서 진짜 힘들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이 근처 유치원 같은 곳에서 연락 와서 아이들 원탁, 의자 주문도 하고 리모델링 같은 일도 하죠. 편백이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좋다고 하니까 요즘 많이 나가요. 전에는 제작만 했는데 이제는 소매도 하고 그래서 옆에 전시장도 만들어 놓고 그랬죠. 요즘 제 별명은 맥가이버 혹은 임박사라고 불려요. 사람들이 뭘 하고 싶다고 말만 하면 제가 다 만들어 내니까 척척박사 임박사라고 하죠. 내가 힘들어도 주변 사람들이 편해야 내가 편해요.”



봉동 중리마을에 있는 그의 가구공장이 이제 비빌 언덕이다. 어려운 코로나 시기도 잘 견뎌냈다. 공장한쪽에는 낚시장비가 가득해서 이제는 아파트에서는 못 살 것 같다고 한다. 쉬는 날이나 짬이 날 때마다 즐기는 낚시 덕분에 힘든 시기를 견뎌냈을지도 모르겠다. 추운 겨울에는 나주에 있는 저수지에서 밤낚시를 하고 2월 중순까지는 왕궁 구덕저수지에서, 4월 초까지는 경천저수지에서, 5월까지는 구이저수지에서 이런 식으로 그는 허가된 저수지에 보트를 타고 들어가 밤낚시를 즐긴다. 아내도 낚시의 손맛을 알아서 그의 낚시 취미에 반대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인생은 그의 표현처럼 맨땅에 헤딩하듯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도전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이제는 맨땅 말고 꽃과 풀과 나무들이 있는 부드러운 땅 위에 헤딩 말고 천천히 거닐면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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