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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마을 유태희 이야기2023-07-25

가인마을 유태희 이야기

유반장과 동네 한바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어린 시절 동네 꼬마였을 때는 그저 누구네 집 둘째, 집 앞에 큰 감나무가 있다면 감나무 집 둘째로 불리는 식이었다. 약점이 별명이 되어 짓궂게 놀리던 청소년 시절을 보낸 뒤 비로서 자신의 첫 직장에서 얻은 호칭이 평생 호칭이 되기도 한다. 처음 이메일 주소를 만들었던 설레던 그 시절의 닉네임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 그 만큼 호칭도 많아지고 아이를 낳게 되면 누구 아빠, 엄마로 불리게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오며 얻게 되는 호칭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의 고유한 삶의 이야기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삼례 가인마을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유태희씨(57년생)에게도 자신의 삶을 살아내며 얻게 된 호칭이 있다. 


우당탕탕 두부 집 셋째 아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자신, 그의 아들까지. 유씨 집안의 이야기는 가인마을에 오래토록 쌓여 있다. 유씨네 오형제중 셋째로 태어낸 유태희씨는 두부를 만들어 팔던 아버지의 일을 제일 많이 도운 아들이다. 형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이미 독립했고 동생들은 너무 어렸다. 어머니는 그가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서 팔았어요. 식구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가게, 술집 이런 곳으로 배달 나가고 그랬죠. 집으로 두부를 사러 오는 사람도 많았고. 명절만 되면 아주머니들이 우리 두부를 떼어다가 팔기도 했어요. 그때는 두부 만드는 일이 힘들었어. 맷돌로 일일이 콩을 갈고 콩물에 간수 붓고 댓돌로 두부 눌러놓을 때 아버지가 나보고 올라가 앉아 있으라고 하셨지. 가마솥에 불 떼기 싫어서 나는 만날 도망 다녔어. 고향 사람 중에 해외에 나간 누나가 전화가 가끔 와요. 나는 너네집 두부만큼 맛있는 두부는 지금까지 못 먹어봤다고 최고로 맛있었다고. 나도 두부를 좋아해서 잘 한다는 집은 다 찾아다니면서 먹어보는데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주던 그 맛이 안 나. 우리 동네에서는 우리 집을 두부집이라고 불렀어. 어떤 어르신은 아직도 우리 집을 두부집이라고 불러요.”

유태희씨 어린 시절 가인마을은 일대에서도 제법 큰 마을이었다. 마을 안에 누에공장과 주조장, 큰 방앗간이 있었느니 말이다. 마을 북쪽으로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도 소개되었던 강대구렁이 있다. 나무가 우거져 한낮에도 어두침침한 숲에 숨어 있던 강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가던 선비들의 돈을 훔치던 곳. 그래서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은 말아 피우는 담배 속에 돈을 숨기곤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여전히 그 골목에는 예전의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유태희씨와 그 골목을 걸으며 먼 길 떠나기 전 주막에 들러 하룻밤 묵어가는 선비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인심 좋고 인정 많은 동네였죠. 그때는 동네에서 장례를 치렀어요. 상주들이 입는 옷을 전부 동네 아주머니들이 손바느질 하고 음식도 다 만들어 대접하고. 저희도 어른들 하시는 걸 보고 자랐으니까. 그걸 이어받아서 30대 시절까지 동네 장례일을 도왔죠. 그때만 해도 인터넷, 전화 이런 게 없던 시절이니까 일일이 다 손으로 부고를 써서 자전거 타고 고산, 봉동으로 직접 다 갔다 줬어요. 상여도 만들어서 젊은 사람들이 상여를 매고 삼우제 되면 식구들 다 밥 먹이고 그랬지. 나한테는 엄마 같던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줬어요. 개인의 일이 아니었어. 마을의 일이였지. 정월대보름날은 아침부터 난리야. 동네 청년들이 남사당패처럼 분장을 하고 바가지를 두 개 들고 다니는데 하나는 밥, 하나는 나물. 여럿이 동네를 돌면 얻어 온 것이 풍부하거든요. 혼자사시는 분이나 좀 어렵게 사는 분들한테 가져다 드리고 그랬지. 밤에는 논에서 쥐불놀이를 해요. 야전이라고 아는가. 야외전축. 그거 틀어 놓고 그 당시 유행했던 앨비스 프레슬리 버닝러브 이런 팝송들 들으며 노는 거지.”

막내기사에서 유반장이 되기까지 
가인마을 사람들은 부광산업이라는 누에공장 덕을 안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곤 했으니 말이다. 유태희 씨의 첫 직장도 그곳이었다. 실 뽑는 기계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는 집집마다 기계를 빌려줬다고 한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왕궁, 금마, 봉동까지 직접 기계를 고치러 가곤 했는데 갈 때마다 삼례에서 막내 기사 왔다며 막걸리를 따라 주는 통에 돌아 올 때는 늘 취해서 자전거를 끌고 왔다고 한다. 그 뒤에 익산 국제 전광사라는 곳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벽시계는 전광사 제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표면 처리하는 도금 일부터 전문적인 전기, 기계일이 계속 연결되었고 익산, 전주, 경기도까지 오가며 공장 관리 일을 했고 그렇게 이삼십 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반장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경기도 올라가 있을 때도 주말마다 삼례 집에 내려오곤 했어. 동네 사람들이 향수병 걸렸다고 했을 정도니까. 와서 불도 한 번씩 때고 청소도 하고. 마음이 떠나지 못한 거지. 마흔 살 언저리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농협 소속으로 일하면서 지금의 삼례예술촌이 양곡, 비료창고 일 때부터 지금껏 창고지기를 하고 있는 거야. 창고 옆 사택에서 집사람이랑 아들 둘, 네 식구가 살았는데 거기 살 때는 우리 집을 비료 창고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창고장이라고 부르기도 했지. 봄부터 정신없이 바빠요. 시골사람들은 부지런하잖아요.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네. 잘 팔 때는 하루에도 2500만원 팔 때도 있었어요. 그때는 다 현금이었으니까 돈 세서 맞춰 놓고 농협 마감하기 이전에 5시 30분 까지 다 입금시켜놓는 거지. 일을 또 야무지게 하니까 계속 비료창고에 주저앉게 된 거지. 중간에 예술촌으로 변해가는 모습까지 다 지켜보게 된 거지. 8년 전에 은퇴를 앞두고 한 달 휴가를 냈어. 은퇴하면 마을로 들어가야 하니까 낡은 집 부수고 새로 집을 지었지. 그런데 은퇴하자마자 다시 완주군청 소속으로 삼례예술촌 관리일을 맡아서 하게 된 거지. 비료창고집, 창고장을 거쳐서 지금은 다시 나를 유반장으로 부르네. 그리고 또 다른 호칭이 생겼죠. 가인마을 이장. 지금 4년째 되어갑니다.“

유반장과 가인마을 동네 한 바퀴를 돌다보면 50년도 더 된 옛날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하다. 지금은 공터가 된 누에공장으로 일하러 나가는 동네 사람들의 잰 걸음. 주조장에서 술밥 찔 때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벌샘에 모여 앉아 빨래하는 아낙들의 웃음소리. 주막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얼굴 붉히며 싸워놓고 다음 날 또 만나 술을 마시는 어르신들의 능청. 마을을 가로 지르는 실개천에서 먹지도 않을 물고기를 왜 그렇게 잡았던지. 그때 같이 코 흘리던 동네 꼬마들은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겼다. 그래도 여전히 두부집 앞마당에 모여 같이 논다. 토종 닭 삶아 동네 선후배가 어울려 소주잔 기울이는 저녁이다. “내 평생을 되돌아보면 이렇게 여전히 삼례에 살고 있으니 이 만하면 좋은 삶 아닐까요?”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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