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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읍 녹동마을 김영표 선생님 이야기2023-05-15

용진읍 녹동마을 김영표 선생님 이야기

눈뜨면 밖으로 나오고 싶은 나의 아름다운 농장 


이번 인터뷰의 소재는 미리부터 텃밭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4월의 텃밭은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꽤 많은 텃밭을 들여다봤다. 할머니들이 가꾸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텃밭에서부터 귀촌한 농사꾼의 제법 규모 있는 농장형 텃밭까지. 그것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 다른 작물들로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전주 상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 20175월에 퇴직하시고, 용진읍 녹동마을에 살고 계시는 김영표 선생님의 정원과 텃밭을 찾았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고 완벽했다. 선생님을 소개해준 지인에게도 대충은 전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퇴직하고 아파트 생활이 답답했어요. 그동안 땅을 너무 파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영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어요. 여기 와보니 245평이에요. 딱 좋더라고. 여기 정도면 내가 살면서 놀이터 삼기 좋겠다 했는데 살아보니 여기도 좀 부족했어요. 그래서 집 뒤편 땅도 빌려서 농사를 조금 짓고 있어요. 원래 논이었던 곳이어서 땅이 질어요. 그걸 밭으로 만들기 위해서 괭이질하고 퇴비 써서 땅을 만들었죠. 일 년에 내가 키우는 작물로만 보면 50~60가지 정도는 돼요. 눈뜨면 밖으로 나오고 싶어요. 닭도 몇 마리 키우고, 아로니아 나무도 심고 수박도 심고 아오리 사과도 심었어요. 폐기물 주워 다가 하우스도 만들고 닭장도 만들고 그랬죠. 시금치, 아스파라거스 등 잎채소들도 많이 키우고요. 닭도 키우면서 산란률이 높은 시기라든가 그런 것들을 많이 기록해놨어요. 나는 천성적으로 움직이고 돌아다니고 그런 사람인 거 같아요.”

 

선생님의 정원에는 수수꽃다리, 꽃잔디, 수선화, 튤립, 아오리 사과나무가 저마다의 색깔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이 가장 좋아한다는 산당화 꽃은 유혹적인 빛깔로 정원 한 켠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봄꽃이 시작되었으니 늦가을까지 피는 국화까지 피어날 꽃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마당 하우스와 뒤편에 있는 텃밭에는 60가지가 넘는 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상추, 쑥갓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잎채소와 파, 마늘, 양파, 오이, 참외, 브로콜리, 양배추, 인디언감자, 와송 등이 자라고 있었다. 올해 심어놓은 대추나무와 함께 사과나무, 감나무, 포도나무 등의 과수들도 빼놓을 수 없는 작물들이다. 2018년부터 시작된 선생님의 농사는 농업 선생님 출신답게 모든 과정이 엑셀 파일에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생님의 정원과 텃밭은 현실에서도 컴퓨터 파일 속에서도 언제나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과수를 좀 심었는데 땅이 안 맞아서 지금은 감나무, 포도나무, 사과나무가 잘 되고, 올해 대추나무를 7주 심었죠. 와송, 브로콜리, 인디언감자, 초석잠 같이 몸에 좋은 것들을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상산고에 있을 때는 학교 정원관리를 내가 많이 했어요. 학교 남쪽 벽에 마삭줄이라는 것이 봄에 가면 정말 멋있어요. 그때 묘목을 구해서 학교 직원들이랑 함께 심었던 거죠. 상산고에 심어진 나무들을 분류하고 소개하는 나무지도를 PPT로 정리해 놓기도 했어요.”

 

김영표 선생님의 고향은 전북 고창이다. 중학교 입학할 때 학생 카드의 장래희망 칸에 농장이라고 썼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농사짓고 사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해서 숯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 다시 농사의 꿈을 이어가기 위해 스물두 살 늦은 나이에 농고에 진학했지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선생님은 학교의 권유로 대학진학을 선택했고 서울대학교 농대에 입학했다. 농업교육을 전공하고 전주 상산고등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치며 살아왔지만 직접 농사를 짓고 사는 꿈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서울 갈 때 기찻값이 지금도 기억나요. 장성역에서 어둑해질 무렵에 완행열차를 탔어요. 그때 요금이 540원이었죠. 새벽 4시쯤에 용산역에 내렸죠. 서울에서 숯 장사 하면서 집안 빚을 다 갚았지요. 하루에 보통 15~20km씩은 걸어 다녔어요. 자전거 타고 다니고 니어카 끌고 다니고 그랬죠. 숯을 한 섬을 사서 그걸 깨뜨리고 봉지에 담아서 동네 구멍가게에 납품하는 거였어요. 한 봉지에 6원 내지 7원 하고 250개를 팔면 1500원 정도 하잖아요. 그렇게 팔면 하루에 3~400원 남았죠. 3년을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빚도 갚고 나니 다시 농사지으러 고향에 내려가고 싶었어요. 그렇게 내려와서 고향에서 2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스물두 살이던 74년도에 정읍농고에 입학했어요. 늦게 시작한 공부라 열심히 했죠. 그렇게 3년 내내 일등을 했어요. 원래 대학에 갈 마음도 없었고 형편도 그렇지 않았는데 학교에서는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서울대 농대에 입학원서를 넣고 덜컥 합격이 됐죠. 동네 이장이 마이크로 방송을 하고 동네잔치가 벌어졌어요. 그때 인생이 180도 바뀐 거죠. 농장을 이뤄야지 하며 버텼는데 25살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땅과 멀어지게 됐어요.”

 

오랜 꿈은 학교를 퇴직하고 아파트에서 벗어나 이곳 마을에 터를 잡은 2017년부터 이룰 수 있었다. 얼핏 들으면 평생을 교사로 재직하다가 은퇴해서 농촌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노부부를 상상할 수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처럼 선생님에게도 삶의 곡절은 적지 않았다. 선생님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그런 것들을 모두 감당해냈고 지금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교사생활 하면서도 5년만 월급 모아서 시골로 내려가자 그런 마음이 포개지고 또 포개지고 그랬죠. 고향 친구들은 야산 개발해서 목장하고 과수원 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어요. 내 꿈이 그거였으니까요.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면 그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그 친구들이 부럽고 서로 부러워하는 거죠.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오히려 퇴직하고 난 뒤에 교사생활 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산고 개교 3년째에 들어갔거든요. 그 당시 처음 담임 맡았던 첫 제자들이 아직도 남아요. 식당에서 밥 먹다가도 누가 계산했다고 하면 제자인거야. 기억이 가물가물하는데 그 친구들이 나를 기억하고 다가와요. 뭘 얻어먹어서 좋은 게 아니라 다들 저마다 자리에서 일을 하며 어른이 된 제자들을 만나는 게 좋은 거죠.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제자들에게 해마다 내가 키운 농작물들을 보내요.”

 

무심코 쓰던 은퇴(隱退)’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 봤다. 맡은 바 직책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서 한가로이 지낸다는 뜻이다. 맡은 바 직책도 없고 그럭저럭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실감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평생을 교직에 계셨고 지금은 꿈에도 그리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선생님에게 은퇴는 어떤 의미의 단어인지 궁금하다. 오랜 직책에서 물러나셨지만, 더 즐겁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선생님의 인생에 은퇴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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