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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마을 이상길, 전귀순 부부 이야기2023-03-24

묵계마을 이상길, 전귀순 부부 이야기



다정한 말은 할 줄 몰라도,

70년을 함께 살았네


묵계마을 이상길, 전귀순 부부 이야기

 

지난 몇 달 동안 동상면에 갈 일이 많아졌다. 수만리 단지마을의 이진영씨를 인터뷰하고 그의 소개로 사봉리 묵계마을의 조인식 이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조인식 이장은 같은 마을에 살고 계시는 노부부를 꼭 만나보라고 귀뜸해 주셨다. 그렇게 귀한 인연으로 이 마을에서 70년을 함께 살고 계신 91세의 이상길 할아버지와 90세의 전귀순 할머니 부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셨고 할머니는 열아홉에 인근 신월리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오셨다. 70년을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문 앞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용하는 지팡이가 나란히 기대어 서 있었다. 열아홉과 스물에 만나 구순이 넘어가는 지금까지의 모든 세월을 상징하는 장면 같았다. 노부부가 사는 거실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갓을 쓰고 계신 이상길 어르신의 부친 사진부터 6남매의 결혼식 사진, 손주들 사진, 결혼 60주년 기념사진, 작년에 결혼 70주년을 기념하며 찍은 가족사진이 이들의 삶을 곱게 편집하듯 벽면 가득히 전시되어 있었다.

 

묵계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1933630일 태어났지. 지금 이 집터가 내가 태어난 곳이야. 어머니는 내가 12살 때 해방되던 해 해방도 못 보시고 돌아가셨지. 내 위로 네 살 위 형, 아래로 남동생 둘 사형제와 아버지만 살아남았지. 여동생들은 어렸을 때 병으로 다 죽고. 해방되기 전에 일제 때는 참 고생 많았지. 나는 그때 어린아이였지만 일본부대 공출하는 거 때문에 해만 뜨면 산으로 갔어. 송탄유(松炭油)라고 소나무 송진 나오는 거 있지. 소나무들을 모아서 그걸 기름을 짜서 일본군 비행기 연료로 썼어. 또 칡넝쿨도 캐서 모아야 해. 그건 일본군 말 먹이로 썼어. 마을마다 정해진 물량이 있어서 그걸 채워야 해. 서른 살 이상 어른이면 100관 이상 캐야 하고 5살 먹은 어린아이들은 1020관 그렇게 캤어. 해방되면 다 좋을 줄 알았더니 6.25 전쟁이 터졌어. 이 부락에만 빨치산들이 3천 명은 넘었던 거 같아.”

 

처음에는 두 분의 오래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할아버지는 자꾸만 다른 이야기들로 분위기를 바꿔 놓으셨다. 6.25 전쟁과 치안방위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못마땅해 하며 그만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을 대표 사진으로 쓰고 싶었지만,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두 분은 나란히 앉지 않으셨다. 주변에서는 결혼 71주년을 기념해야 한다고 부산스럽지만 정작 이들 노부부는 뜨뜻미지근했다.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는 오래된 레퍼토리를 계속 이어나가셨다.

 

그때 빨치산들 피해서 동네 청년들이 진안 부귀로 넘어갔어. 진안 부귀는 인민군이 있기는 했어도 경찰대가 있었어. 형님 따라 거기로 가서 의경 전투대 소속이 돼서 일을 시작한 거지. 그때 내 나이 17살이었어. 자네도 그 시절에 태어났으면 총 들고 싸웠을 거야. 그러다가 전주 북중학교 앞쪽에 여관이 있었는데 동상면 사람들이 모여서 고향지키기 위해 방위대를 조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직을 만든 거지. 그러다가 형님은 다시 차출되서 동상면으로 돌아와 작전을 한 거야. 모래봉 작전. 3월 무렵에 전사하셨지. 지금은 임실 군경묘지에 묻혀 계셔. 큰 자식마저 그렇게 가니까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허망하고 무서워. 남은 아들 셋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주로 피난을 간 거지. 전주 기린봉 자락 밑에 가재미 마을이라고 있었어. 거기서 방 얻어서 살았어. 전주로 나가긴 했는데 17살 먹은 놈이 뭐 할 수 있는 게 있겠어. 밥이라도 안 굶으려고 치안경찰대를 들어갔어. 전주시 방위대야. 전주 남문을 총 메고 지켰지. 내 동료들도 많이 죽었어. 나는 명이 참 길었나 봐. 그 난리 속에서도 살아난 걸 보니까.”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기억은 구체적이고 명료했다.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울 뿐이지 그 이야기가 허황되다고 생각하진 않으셨다. 할아버지 인생에서 방위대 활동을 했던 기억은 인생의 가장 큰 흔적으로 남아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목숨 줄이 긴 건도 아마 먼저 세상 떠난 형제들 대신 사느라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시절이 그저 흘러간 과거이고 역사일 뿐이겠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너무 얇았던 그 시절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고 어쩌면 삶의 가장 중요하고 강렬한 한 부분일 것이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짧은 전주살이를 접고 열아홉에 다시 동상면 고향 마을로 돌아오셨다.

 

결혼은 스무 살 먹어서 했어. 서로 누군지도 모르고 결혼식 날 처음 봤지. 안사람은 신월리에서 시집왔어. 하인이 많았어. 그 하인이 뭔고 하니 나랑 같이 동상면 치안대로 일했던 대원들이야. 그 대원들이 나무로 가마를 만들어서 거기에 안사람을 태워왔지.(옆에서 듣고 계시던 할머니는 가마가 아니고 들것이었다고 기억했다) 막 결혼해서는 움막 같은 곳에서 살았어. 전쟁통에 집이 다 불타고 없어서. 그러고 살면서 이 터에 집을 짓고 그 뒤에 1991년에 다시 지어서 지금껏 살고 있어. 시집와서 우리 안사람이 고생 지긋지긋하게 했어. 뭔지 알지도 못하고 시집을 왔지. 왔더니 시동생 둘에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 모시고, 새신랑은 빨치산 잡으러 다닌다고 한 3년은 산으로 돌아다녔으니 말 다했지.”

 

몸이 불편하신 할아버지 대신 집안의 온갖 일은 할머니 차지가 되었다. 밭일은 아들 내외가 와서 거들고 할머니는 구경만 하신다고 하지만 마당에는 그때 그때 반찬해먹을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화단 한 쪽에는 지독히도 예쁘다는 수선화가 연두 잎을 내밀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 평상이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다. 그곳에 할머니와 함께 앉아 산을 바라봤다. 할아버지의 청춘이 넘나다녔을 산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 할머니의 청춘도 이곳에 앉아 기다렸을 것이다. 낯선 시집살이 와중에도 틈틈이 산을 올려다보며 기다렸겠지.

 

-할아버지: 아내한테 한마디 하라고?

-할머니: (괜히 돌아앉으며) 하이고, 할 말은 무슨..

-할아버지: (겸연쩍은 듯 할머니를 보고는) 참말로 우리 집에 와서 고생만 했지. 그것 뿐이지. 내가 아내한테 다정한 사람은 못되지만은, 아내가 고생한 걸 알기는 알아. 그 마음 만은 알아. 지나고 보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이었으니까 살았지.

사랑 아니면 나가버리지 뭐더러 같이 살아.

-할머니: 몰라 우리는 사랑도 몰라. 사랑이 좋은 것인가, 뭐싱가도 모르고 살았어.

시방도 살아. 사는 것이니까 사는 거야.

 

인터뷰를 마치고 주차된 차까지 걸어가는 내내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배웅을 해주셨다. 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오는 동안 좋아하는 노래의 한 구절이 계속 맴돌았다.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을 찾는 거야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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