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장미경의 삶의풍경

단지마을 공동체공간 '수작' 이진영 씨 2022-12-26

단지마을 공동체공간 '수작' 이진영 씨



수만리 단지동 앞멀에 둠벙을 파놓은 이유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는 조선의 문신 이서구가 전라감찰사 시절 산중 오지인 이곳에 장차 물이 가득 찰 것이라고 예언하며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로 1966년에 댐을 막고 동상저수지에 물이 들어차면서 수만리라는 이름의 예언이 들어맞게 됐다. 전주에서 소양 방향으로 들어가도 송광사, 위봉사, 입석마을을 지나야 하고 고산에서 들어가도 소향리, 대아수목원을 지나 동상면 소재지 방향으로 한참을 가다 위봉사 방향으로 이어진 음수교를 건너가야 수만리 단지동 앞멀에 사는 이진영씨(50)를 만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수만리는 제 고향입니다. 대아댐이 생기면서 일차적으로 마을이 잠겼어요. 그때 우리는 저수지 윗동네였죠. 큰 동네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우리 동네마저도 수몰되면서 일부는 군산으로 가고 나머지는 단지동, 학동, 입석, 다자 같은 근처 마을로 들어갔어요. 2004년에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고산장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했어요. 초등학교는 동광초등학교를 나왔어요. 동상, 동광, 동공, 은천 쪽에도 하나 있었고 그때는 리마다 학교가 하나씩 있었죠. 계속 도시로 나가면서 학교들이 다 없어졌어요.”

 

지금은 자동차도 있고 또 동네까지 마을버스도 들어오지만, 가까운 입석마을에 버스가 들어온 것도 20년 전이고 그 전에는 걸어서 한 시간 걸리는 소양면 오성리까지 나가야 전주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세 시간에 한 대씩이라 버스를 놓치면 송광사까지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이 동네가 물이 좋아요. 학교 일찍 끝나면 집에 안 들어가고 매일 밖에서 놀았어요. 집에 와도 할 일이 없거든요. 농사를 많이 짓는 것도 아니어서 애들이 도울 일이 많지 않았어요. 겨울에는 눈썰매 타고 놀았죠. 동네에 둠벙이 있는데 둠벙 위를 막아서 아래쪽 물을 다 퍼내요. 그렇게 물고기 잡아서 불 피워서 구워 먹고, 개구리 잡고, 올무로 토끼 잡아서 먹고 그랬죠.”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의 이야기는 고산을 오가는 나룻배 이야기로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고산 6개면의 물산이 모이는 고산장을 가기 위해 하루 대여섯 번 다녔던 나룻배를 이용했고 배삯은 해마다 한 번씩 쌀이나 돈으로 모아서 줬다고 한다. 진영씨는 어머님 고향이 고산면 성재리여서 명절이면 이 배를 타고 외가에 다녀왔다고 했다.

 

버스 시간에 맞춰서 오가는 배여서 정해진 시간에만 운영했어요. 9, 12, 3, 6, 7시 이런 식으로 여섯 번 정도 버스가 있었거든요. 어렸을 때는 나무배였고 나중에 모터 달린 배로 바뀌었죠. 나무배였을 때는 노를 저었어요. 외노라고 일자 노가 있었어요. 중학교 들어가면 어른들이 가끔 노 저어보라고 시켜요. ‘바위와 풍경카페 아래쪽 근처가 선착장인데 저수지 막은 댐까지 거리가 상당히 멀어요. 30분은 가야 해요. 배 출발할 시간 되면 경운기나 소달구지에 물건 싣고 선착장으로 모이는 거죠. 배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해서 그거 못타면 무조건 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거야. 겨울에 얼음 많이 얼었을 때는 나무망치로 깨서 뱃길을 어느 정도 만들면서 다니기도 했고 아예 얼어서 60센티 이상 두께로 얼면 그 길을 육로처럼 왔다 갔다 했죠. 경운기도 다니고요. 배가 새로 바뀔 때마다 고사도 지냈어요. 그 시절을 기억하던 분들은 많이 돌아가시고 그 시절을 기억하고 목격했던 이들만 남아 있는 거죠.”

 

이진영씨는 중학교 때부터 나가 살다가 20년 전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다시 고향 마을 단지동으로 돌아왔다. 감 농사와 표고 농사를 짓던 아버님의 건강이 나빠지신 게 이유였지만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에서의 추억과 그리움이 어쩌면 그를 다시 고향 마을로 불러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감 일 할 때 되면 고산에서 일손 도우러 많이 넘어오셨어요. 스무 명씩 우리 집에서 2주간 숙식하면서 일했죠. 지게 지고 산에 올라가서 한 바작 따고 와서 점심 먹고 오후에 한 바작 따고 그랬죠. 사람이 지게 지고 산길을 걸어 올라가서 감을 따서 내려와야 하니까 힘든 일이었어요. 골짜기에 물이 모이는 곳 주변으로 감나무를 심었던 거죠. 그러니 수확하는 게 힘들었죠. 그때 남자들이 감 따는 일을 하고 감 다듬는 일을 여자들이 하고 그랬죠. 저 산 8부 능선 골짜기에 감나무가 있거든요. 어머니가 고산 성재리가 고향이세요. 거기 분이 산을 넘어 우리 집에 오셔서 감 따고 감 깎는 일을 하셨어요. 골짜기 넘어오면 한 시간 반 걸려요. 그렇게 걸어오시든지 버스 타고 배 타고 들어오시든지 그랬죠.”


    

 



진영 씨의 지인 김유녀 씨가 운영하고 있는 연리지 다원. 튀르키예 전통 카페트와 소품들이 이색적인 곳이다. 튀르키예 홍차, 튀르키예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 북스테이 아래층 여러명이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눌수 있는 공간, 수만교에서 바라본 풍경. 오른쪽 물가에 선착장 흔적이 남아있다. 십여 년전 전통술교육을 통해 만난 지인들과 공동체공간 수작을 만들고 올해 양조장 인허가도 완료했다. 순곡주 빚을 때 필요한 누룩을 법제 중이다.


이진영씨는 전주에서 인테리어 목수로 일했고 그때 망치라는 닉네임을 만들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젊은 그에게 이장 일이 맡겨지기도 했다. 2012년에 아는 목사님 소개로 서울사람이었던 아내와 만나 결혼을 했다.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지만, 귀촌을 꿈꾸던 아내를 만나 지금 살고 있는 터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벌여 나갔다. 이진영씨는 그런 일을 둠벙을 파는 것에 비유했다. 거점공간이라고 부르는 그의 둠벙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예전시관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2층에 민박집을 지었죠. 동네 어른들 5명 모아서 공동출자해서 지었어요. 민박 손님들 조금씩 받고 있고 완주문화재단 예술가 한 달 살기 프로젝트도 참여하고요. 사람이 오려면 놀거리와 만날 장소가 있어야 해요. 수만리에는 그런 거점공간이 없었어요. 나랑 놀아줄 사람 여기 모여라. 말하자면 둠벙을 파야 하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모여요. 친구 하나가 올해 이사 오기로 했고, 2년 전에 김유녀 누님이 들어오셔서 카페 운영하시고 올해 관광두레 선정되었고 양조장 인허가도 끝났어요. 카페 이름은 연리지 다원, 2층은 북스테이 동상, 공동체공간 수작은 양조장, 햇살공방은 목공소. 이제 놀이터가 만들어졌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진영씨는 인터뷰 말미에 녹색평론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쿠바의 어느 바닷가에 어부가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미국인이 당신은 왜 물고기를 많이 잡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부가 대답했다.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뭐하냐고. 미국인이 말했다. 큰 배도 사고 성공해서 노후에 편안하게 살면 좋지 않냐고. 그러니까 어부가 대답했다. 지금 편하게 살고 있다고. 이진영씨는 그 편안하고 좋은 삶을 혼자보다는 여럿이서 함께 꾸려가고 싶다고 했다. 물과 바위산 풍경을 보느라 빠르게 지나쳤을 그 길. 잠시 옆길로 새보자. 누군가가 10년의 계획으로 정성스럽고 집요하게 만들어낸 놀이터이자 둠벙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잠시 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셔도 좋을 테고 공기 좋은 곳에서 정성스럽게 빚어낸 순곡주 한잔 하며 하룻밤 자고 가도 좋을 곳이다. 그러다가 둠벙에 풍덩 빠져 그들의 이웃이 되어도 좋을 일이다.




 오래 전 나룻배를 타고 이동하던 수만리 사람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경천면 신덕마을 남춘자 할머니
다음글
봄날의 햇살같은 사람, 운주면 평촌마을 김민주 씨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