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이 품은 이야기] 붉은 지붕의 차돌빼기 공소2022-10-24
백석공소
백석마을은 예부터 ‘천주교 교우촌’으로 교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1866년 대규모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붉은 지
붕의 백석공소는 1883년 두세 신부에 의해 설립된 것이며 이는 차돌배기, 차독배기, 차돌빼기 등으로도 불
린다. 혹자는 ‘백석’을 ‘차돌빼기’라 부르는 건 마을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있어 두 지역의 사투리가
혼합돼 이런 지명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1884년 마을에 방문한 조스 신부의 교세 보고서에 의하면 백석 공소는 신자 수가 86명으로 제법 규모가
큰 편이었다. 1890년 방문한 보두네 신부는 ‘큰 공소. 생활이 좋다’라고 평하였으며 당시 신자 수는 113명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인근 지역의 공소 중 가장 많은 교우 수로, 다음으로 신자가 많은 곳은 고산 빼재
가 86명, 되재는 22명이었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며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구제리 황새막골에서 연일 사
상자가 발생하자 본당을 되재로 옮기며 다시금 공소로 격하되었다. 이후 공소 회장 가정에서 공소 예절이
봉헌되다가 현 위치에 있던 초가집을 매입해 공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1992년 소양면에 거주하는 한 신
자의 도움으로 조립식 공소 건물을 준공하였으며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백석의 교인들은 “옷이 없는 사람을 보면 옷을 주고, 배가 고픈 사람이 있으면 밥을 주고, 집이 없는 사람
이 오면 잠을 재워준다”는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 일례로 한국전쟁 당시 신자가 찾아오면
무조건 숙식을 해결해 준 일이 있다. 같은 형제자매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힘든 순간에서도 선조들이
물려준 신앙을 간직하고 나누고 베풀며 단단한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이밖에도 지체장애인 보호시설인
‘무지개 가족’과 ‘작은 자매의 집’과 같은 사회복지 시설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이
어오고 있다.
시간이 지나 주민 수가 줄며 신자 수 또한 격감하였다. 1962년만 하더라도 118명(남 61, 여 57)으로 본당
관할 공소 중 세 번째로 컸던 백석은 1992년에 들어서며 7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점차 축소되다가
2016년을 기점으로 귀농·귀촌인으로 인해 세대수가 25세대를 넘어서며 다시금 규모를 키우는 중이다. 노
인회, 부녀회, 운영위원회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마을 사업으로 길 가꾸기, 백석 마을의 이야기를 알리는
안내판을 공소 앞에 설치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소 : 완주군 원구제길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