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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다양성 무지개다리] 김화순 용진읍 문화이장2022-05-19

[문화다양성 무지개다리] 김화순 용진읍 문화이장

"장애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③ 용진읍 김화순 문화이장

용진 효천마을의 안쪽 길을 따라가다 보면 2층짜리 하얀 집이 나온다. 마당에 만개한 봄꽃들이 화사하게 반겨주는 곳이다. 이곳은 용진읍 문화이장 김화순(67) 씨가 운영하는 장애인그룹홈 늘푸름그룹홈이자 그의 집이다. 40여 년 동안 장애인 관련 활동가, 돌봄 시설 운영자로 일해 온 그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의 마음으로 시작한 활동

김화순 씨에게는 자녀가 둘 있다. 그중 큰딸 유연주(44) 씨는 발달장애인이다. 딸 연주 씨는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고 다른 장애도 가진 중복장애인이었기에 일상생활을 하는데 신체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학교에 다닐 무렵 다양한 문제에 맞닥뜨리기 시작했다. 30년 전에는 장애아동을 위한 교육제도나 지원책이 따로 마련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사회적으로 뿌리박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마인 김 씨가 나서게 된 것이다.

“1979년도부터 우리집에서 장애인 부모 모임을 시작했어요. 신체적으로 불편함을 겪는 건 병원에 가면 해결됐지만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나 돌봄 등에 대한 어려움은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웠거든요. 장애아 부모들끼리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힘을 얻기 위해서 모임을 마련했던 거예요.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거죠.”

그렇게 40가정의 부모가 70~80명가량 모였던 모임은 전북장애인부모회의 시초가 되었다. 1986년 전북장애인부모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그 다음해 특수교사와 함께 재활치료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별 다른 공간이 없었기에 이 모든 것은 김 씨의 집에서 이뤄졌다. 이후 그의 딸인 연주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디뎌야할 무렵에 또 한 번 고비가 찾아왔다. 발달장애인은 성인이 되어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이 학교를 다닐 땐 학교에 보낼 수 있었는데 성인이 되고나니 더 막막해졌어요. 하루 종일 가족이 옆에서 돌봐야 하는 상황이 생겼는데 이건 모든 장애인 부모가 겪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당시 전주에 살던 아파트에서 그룹홈을 운영하게 됐어요.”

도심 속 아파트에서 그룹홈을 운영한다는 것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김 씨는 33평 남짓한 곳에서 6명의 발달장애인을 돌보면서 민원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날이 갈수록 주변 이웃들에게 소음 문제로 신고를 당하기 일쑤였고 이때 김 씨는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 이에 201010월에 현 위치인 용진 효천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쫓겨나듯 어쩔 수 없이 결정한 선택이었지만 김 씨는 이 선택을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로 꼽는다. 여전히 장애인 시설은 기피대상이기에 정착할 곳을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이 주변에 거의 논만 있고 아무 것도 없었거든요. 또 마을 어르신들도 장애인이 들어온다고 해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주셨고요. 저는 이곳에 이사 온 것을 축복으로 생각해요.”


문화이장 1차 워크숍

 

기획자로서 진심을 다하다

완주에서 생활한지 12년차 된 그는 늘푸름그룹홈 운영 외에도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발을 뻗어나가고 있다. 김 씨는 마을에서 부녀회장을 8년째 맡고 있으며 2020년도 완주문화재단 문화이장 3기로 발탁되었다. 또한 20208월 용진읍 용꿈작은도서관을 위탁받아서 운영하고 있다. 그가 지역문화의 매개자로서 활동을 이어가는 건 지역에 있는 장애인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경험을 넓혀주기 위함이다. 그는 자식과도 같은 아이들이 하나라도 더 얻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2020년에는 용진읍에 거주하는 성인장애인과 함께 전주한옥마을로 나들이를 떠났다.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는 프로그램 일정표에도 그의 섬세한 애정이 묻어났다.

장애인들은 어딜 가든지 큰 맘 먹고 나가야만 해요. 그 보호자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집이나 실내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바깥 구경하는 게 어려워지죠. 문화이장 첫 해에 전주한옥마을로 나갔던 것도 아이들을 위해서였어요. 그때 장애인 한 명마다 자원봉사자 한 명씩 일대일로 옆에 붙어서 한복입고 돌아다녔어요. 제일 비싼 떡갈비도 먹었고요.(웃음)”

그동안 수많은 차별을 경험한 장애인들이 이날만큼은 특별한 대우를 받길 바랐던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장애인들이 다양한 공간에서 더 많은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길 바란다. 이에 지난해 용꿈작은도서관에서는 3주간 성인장애인 15명을 대상으로 도서관의 역할을 소개하고 책 읽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그가 기획한 프로그램은 부모나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에도 그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우리 아이만 봐도 그래요. 장애인들도 부모님 없이 자유시간을 만끽하는 걸 좋아해요. 왜냐면 아이의 특성을 부모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아이들이 부모 눈치를 살피게 되거든요. 그래서 부모를 동행하지 않는 걸로 기획을 했고 대신 일대일로 자원봉사자가 옆을 지켰어요.”


활동계획 공유테이블    

 

우리 곁에 은연한 차별들

지난 40여 년간 장애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써왔던 그에게도 최근 고민이 생겼다. 그의 곁에 있는 장애인들이 밖에서 차별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쉼터 안에서 차별을 받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검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고민은 완주문화재단 완주문화다양성발굴단 소수다에 참여하면서부터 더 깊어졌다.

소수다 활동하면서 항상 깜짝 놀랐어요. 참여자들끼리 항상 차별을 주제로 교육을 받고 토론했는데 어떻게 보면 제가 우리 아이들한테 가장 많이 차별했더라고요. 당연히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내가 더 잘 한다고 생각해서 제지시켰던 것들이 많았거든요.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여기면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깔려있었던 거였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김 씨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몰랐을 때는 그냥 넘어갔던 것들도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 것이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더욱이 조심하게 됐다. 또 그동안은 주로 장애인과 관련된 것들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젠 그 관심사도 넓어졌다.

원래 저는 장애인이 아닌 다른 소수자에 대한 내용들은 남 얘기로 들렸어요. 그전에는 다문화에도 관심이 적었고요. 근데 아들이 태국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거기서 며느리를 만났더라고요. 소수자나 차별에 대한 공부를 안 했으면 이걸 이해하기 어려웠을텐데 다행인 거죠.”

밖으로 드러나는 차별도 있지만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차별이 은연하게 깔려있다. 이를테면 장애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해석하는 것이 장애에 대한 대표적인 편견이다. 장애인의 상태를 불편한 것이라 판단하고 불쌍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장애인의 현실은 아직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김 씨도 의견을 보탰다.

“40년 전만해도 장애인이란 단어도, 인식 자체도 없었어요. 그냥 병신이나 멍청이라고 불렀으니까요.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제도도 생겨났고 지원받기 위해 문을 두드릴 곳이 생겼으니 나아졌죠. 하지만 아직도 장애인들이 인정 못 받고 차별받는 게 당연해요.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에요. 잘 해주려고 하지 않아도 되니까 장애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면 좋겠어요.”


문화이장 4기 공통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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