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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5] 봄나물과 탁주(濁酒)2022-05-19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5] 봄나물과 탁주(濁酒)

봄나물과 탁주(濁酒)


봄비가 온 뒤의 산행엔 다른 속내가 있다. 나뭇가지 끄트머리만 보거나 길 가상으로 수북한 수풀만 쳐다보다 어느새 산 정상이니 등산의 목적이 분명 다른 곳에 있다. 나는 숲길 잡풀들 틈에 취, 고사리며 두릅, 고비 같은 나물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지난 십여 년간 완주를 에워싸고 있는 거의 모든 산을 오르내리며 터득한 소중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봄 산행은 지루할 틈이 없다. 산을 찾아온 메마른 한 인간에게 산이 주는 선물이라 여겨 그것들을 잘 다듬고 데쳐 감사히 먹곤 한다. 이때 곁들이는 술은 단연 탁주나 막걸리이다. 우리 땅에서 솟아난 나물에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의 질감을 그대로 담아낸 탁주나 막걸리만큼 어울리는 술이 또 어디 있겠는가.

 

쌀로 빚은 우리 술을 체에 거르면 그야말로 새하얀 우윳빛 술이 짜진다. 같은 발효주인 와인이나 맥주, 사케와 달리 불투명한 탁도를 특징지어 이 술을 탁주라 한다. 용기에 담아 2~3일 지나면 하얀 전분 층이 가라앉아 맑고 투명한 술이 층을 이루는데 이 맑은 술을 청주라 한다. 그러니 청주와 탁주는 한 몸의 술이다. 맑은 술만 떠서 마시면 청주, 흔들어서 탁하게 마시면 탁주이다. 막걸리는 탁주와 엄밀히 다른 술이다. 탁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고 농도가 진하니 물을 더 첨가해 걸러 마시는 술이 막걸리이다. 탁주는 거의 원주 상태로 본연의 향과 맛을 즐기는 술이고,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를 탁주의 절반가량으로 낮춰 힘든 노동을 끝낸 일꾼들이 양껏 마셔도 덜 취하게 되는 미덕을 지닌 술이다. 탁주와 막걸리의 가라앉은 전분 층에 함유된 영양 성분과 든든한 곡기는 산나물이나 텃밭 푸성귀 안주로도 속을 편안히 받쳐 주니 바쁜 농사철 농주로 제격인 셈이다.

 

앞산에 비가 개니 살진 나물 캐오리라

삽주 두릅 고사리며 고비 도라지 으아리를

일부는 엮어 달고 일부는 무쳐 먹세

떨어진 꽃잎 쓸고 앉아 병술을 즐길 때에

아내가 준비한 일품 안주 이것이로구나

 

조선 후기 실학자 정학유(1786-1855)가 쓴 농가월령가 3월령 말미의 가사이다. 농가월령가는 정월부터 12월까지 농가에서 해야 할 농사와 세시풍속 등이 월별로 총 망라된 노래 가사이다. 노랫말 속 300년 전의 사람들은 변화하는 사계절에 의지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길쌈, 양잠, 장 담기, 술 빚기 등 자급자족의 일거리들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불과 40여 년 전 내 유년시절 사람들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농사가 세상의 근본이라 여기던 때의 삶은 얼마나 여유롭고 멋스러운가. 떨어진 꽃잎을 쓸어 모아 놓고 앉아 막 거른 술을 병에 담아와 산나물을 안주 삼아 다정하게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꽃이 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산채를 안주 삼아 술 한 잔 곁들이는 봄 마중이야말로 낭만과 여유로움의 절정이다. 한 번쯤 따라 해봐도 좋을 옛사람들의 여유는 이 아름다운 봄날에 향긋한 두릅 한 접시와 탁주 한 잔으로도 충분하다.


 / 유송이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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