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 소농리 원소농마을] 유민상 어르신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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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 고생했으니 이젠 나무나 가꾸며 쉬려고"
마을회관 맞은 편에 위치한 커다란 차고가 달린 집에는 유민상(84) 어르신이 산다. 그는 원소농마을에서 남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데, 그럼에도 여전히 부지런히 움직이며 하루를 보낸다. 매일 아침 먼지 쌓인 마당을 쓸고 송아지에게 여물을 먹인 뒤엔 닭과 오골계가 낳은 알을 꺼내둔다.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정원을 가꾸는 일도 그의 몫이다. 원소농마을을 찾은 이튿날, 어르신은 어김없이 화단에 심을 식물을 옮기고 있었다. 낯선 객의 방문에도 반갑게 맞이하며 미소 짓는 그는 잠시 쉬어가라며 마당 한쪽을 내어주었다.
경운기를 운전해 퇴비를 나르고 국화를 화분에 옮겨 심는 유민상 어르신.
역사로 남은 조부의 숭고한 희생
민상 어르신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다. 그의 조부는 의병 활동을 하다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모진 고문을 받다 9년 만에 결국 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 어르신은 “그때 할아버지 열 손가락 손톱이 다 뽑히셨는데 고통이 얼마큼인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며 조부를 생각하며 잠시 묵념을 올렸다. “한 번은 할아버지를 포승줄에 감은 채로 일본 순사들이 집으로 처들어왔었어. 의병 활동 때 쓰는 총이 어딨는지 찾아내려던 것이지.” 당시 그는 겨우 걸음마를 떼던 나이였다. 그럼에도 직접 목격한 듯 자세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역사를 잊지말아야한다’며 틈틈이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모진 세월도 꺾을 수 없던 우직한 삶
그의 나이 열두 살에는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주변 마을에 비해 부촌으로 꼽혔던 원소농마을은 전쟁 이후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몰고 온 비극은 주민들의 일상을 뒤흔들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어르신은 “전쟁 터지기 전처럼 돌아가기 쉽지 않았다. 힘들다 보니 술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고되게 일을 해도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부양하고, 어린 자녀들을 모두 키우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며 어떤 일이든 해야 했다. 벼농사는 물론이고 수박이며 고추며 그의 손을 거쳐 가지 않은 작물이 없을 정도다. 그는 해방과 내전, 보릿고개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가늠할 수 없는 지난한 세월을 덤덤히 들려주며 “젊었을 때 그렇게 고생했으니까 이제는 나무나 가꾸며 쉬려고”라며 웃었다. 화분에서 꺼낸 식물을 땅에 옮겨 심었다. 그가 일군 정원에는 모란, 할미꽃, 소나무 같은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가득했다.
어르신의단정한 장독대와 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