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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노래]15. 인생의 친절한 힌트2022-02-15

[사람의노래]15. 인생의 친절한 힌트

사람의 노래

⑯ 춘하추동과 베토벤 


얼마 전부터 동네 주민과 함께 마을걷기를 하고 있다. 너무 춥지않을까라는 앞선 걱정과 달리 입춘이 지난 이른 아침 마을회관 앞에는 햇살이 충분하여 앞뒤로 흔드는 손 말고는 딱히 추위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겨울을 묻힌 봄이 슬슬 움직이나보다. 생로병사가 우리에게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의 길이라면, 춘하추동은 미련한 내가 그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짧은 버전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생로병사의 친절한 힌트지 같다. 아직 숨어있는 봄에게 내 마음을 주고 음악을 들으며 동네를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리히터(Sviatoslav Richter)가 연주하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피아노 소타나 1번. 환갑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베토벤이 25살에 첫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으니 시기적으로 본다면 그의 인생 중 여름 즈음에 만든 곡이라고 해야할까. 25살에 첫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지만, 사실 그는 이 곡을 쓰기 전에 다량의 피아노 소품들을 작곡했다. 조용히 움이 트는 봄을 지내는 동안 소나타의 작은 형식인 소나티네를 비롯하여 이제는 사람들이 거의 연주하지 않는 소품들을 만들어가며 꽃봉오리처럼 앙다문 자신의 첫 소나타 쓸 때를 기다렸다.


작곡의 과정이라는 게 흔히 접할 수 없는 부분이다보니 사람들은 가끔 재밌는 상상을 한다. 예를 들어 작곡가가 처마 밑 물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영감을 받아 하얀 오선지를 펼치고 하늘에 떠도는 악상을 낚아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음표를 그려나가다보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던지 하는 상상.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은 도움닫기하듯이 톡톡 튀어 최고음까지 점프하는 두마디로 시작하는데 이 첫 두마디에 이 곡의 전체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감과 즉흥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악상이 아닌 봄 꽃몽우리처럼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는 첫 두마디를 쪼개고 나누어 작곡가가 춘하추동을 살아낼 이야깃거리를 뽑아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첫 두마디를 잡고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음악적 동기(Motiv)를 곡의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25살의 베토벤이 보인다. 스스로에게 취하지 않고 음과 음열에 작품을 맞추며, 연주자가 악보만 정확히 지킨다면 작곡가의 부연설명 없이도 스스로 울릴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젊은 작곡가가 새삼 대단하다.


완주로 넘어와서 어설프게나마 처음으로 느낀 아침과 밤의 무게와 봄과 겨울의 공기차를 오늘 베토벤의 소나타를 들으며 다시 훑어보게 된다. 환한 아침에 에너지를 내고, 어두운 밤에는 잠을 자며 한껏 더운 여름에는 일들을 벌이고 손발이 어는 추운 겨울에는 나만 보는 습작을 쓰며 몸을 웅크린다. 아침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따라 나의 밤이 영향을 받을 것이며, 봄을 맞이하는 나의 모습 안에 그 해 겨울이 들어 있다. 베토벤의 소나타 1번 첫 두 마디에 전체를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처럼.


덧붙이고 수식하는 것은 약간의 애만 쓴다면 힘들지 않지만,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내어 풀어내는 것은 꽤나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움트는 봄을 그대로, 지나간 겨울과 새로운 겨울을 동시에 머금은 봄으로 살아낼 수 있기를, 높이 떠서 춘하추동을 한눈에 그릴 수 있는 봄이 되기를 바란다. 그나저나 클래식을 들으며 걷기 운동을 하는 건 별로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걸음걸이에 속도가 붙지를 않으니 그냥 어슬렁대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김민경(완주문화재단 한달살기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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