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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노래] 14. 참을 수 없는 털신의 따스함 2022-02-03

[사람의노래] 14. 참을 수 없는 털신의 따스함

사람의 노래

⑯ 털신


얼마전 고산 베르의 사장님이 서점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여름에는 굽이 낮은 뽀족구두, 겨울에는 털신만 신고 다니시네요.” 가만 생각해보니 날이 추워지고서는 계속 털신만 신고 다른 겨울 신발은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처음 화산으로 들어왔을 때, 문화아지트 빨래터 최미경대표가 아직 겨울도 아닌데 털신을 신고 다니는 것이 참 희한해 보였다. 아들 학교에 강의 하러 간다며 또 털신을 신고 나가는 모습에 “아이가 중학생인데 할머니처럼 그 신발 신고 가시게요?”라며 주제넘은 참견을 하기도 하고, 최대표가 머쓱 웃으며 “이 털신이 얼마나 따숩고 편한지 선생님은 아직 몰라서 그래요”하며 서로 웃었던 기억도 있다.


얼마지나 화산 문화이장님이 손수 꽃 그림을 잔뜩 그려 털신 한 켤레를 나에게도 선물해주셨다. 털이 갈색인 게 좀 촌스럽다고 생각을 했지만, 검은 고무신에 꽃그림이 너무나 곱고, 또 뭔지모르게 힙하다는 생각에 받고 나서 한참을 기분이 좋았다.


고운 신발을 받고 얼마지나지 않아 날이 쌀쌀해졌다. 신발 입구에 있는 털들은 장식용 같아보이고 바닥에는 정작 보온이 안 되어있는듯 했지만, 맨발이건 양말을 신건 손 안대고 그냥 쑥쑥 신을 수 있는 편리함에 자꾸자꾸 발이 갔다. 도시와 다르게 흙이 많은 시골생활에 비나 눈이 오면 질퍽해지는 땅을 마구 밟아도 까만 털신은 추운 발을 보송하게 지켜주었다. 게다가 신발에 진흙이 묻을까 조심히 다닐 일도, 집에 와서 옆에 묻은 흙을 닦아 내야하는 귀찮음도 털고무신을 신은 날은 패스이다.

눈이 와서 살짝 얼은 길을 지날때도 내 부츠보다도 더 미끄럼방지가 잘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산으로 이사와서 새로 시작한 두집살림, 생활하는 안채와 작업실로 쓰는 별채로 나뉜 집 사이를 수시로 왔다갔다 할 때 대충 툭 꺾어신고 질질 끌어도 고무털신에는 자국 하나 남지 않는다. 이러니 이 고무털신을 애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요즘 너무 외모에 신경을 안 쓰는듯한 생각을 몇 번 하기도 했었고, 나의 신발신는 패턴을 간파하신 베르 서점 사장님의 세심한 관찰력에 게으른 마음을 들켜버린 나는 1년만에 다른 겨울 신발들을 꺼냈다. 마루에 신문을 깔고 앉아 종아리까지 오는 가죽롱부츠에 구두약을 다시 바르고 라이터로 지져 광을 내고, 털이 달린 크록스도 꺼내서 먼지를 털어줬다. 이제 좀 신경쓰며 깔끔하게 하고 다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한 며칠 뾰족한 신발을 신고다니다 보니 기분이 살짝 좋아지는 듯 했지만, 내 발이 나도 모르게 자꾸만 털신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을 보는데 채 일주일이 안 걸렸다. 반짝거리는 롱부츠 옆에 별거 아닌듯 먼지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털신의 편안함과 따스함은 나의 박약한 의지로는 감히 함부로 멀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022년 새해가 왔다고 뭔가 크게 달라질 일이 없다는 건 나이를 먹어가며 배웠다. 거기에 더해져, 나를 포함하여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들, 작년과 새해를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가는 작업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소중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털고무신을 보면서 해본다.


빤닥빤닥 목이 긴 겨울 부츠도, 문화이장님이 손수 꽃 그려주신 털신도 모두 내가 신는 신발이다.


김민경(완주문화재단 한달살기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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