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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산 아래 학동마을] 학동교회 장영선 장로 2021-01-18

[대부산 아래 학동마을] 학동교회 장영선 장로


 

불탄 교회 주민들이 벽돌 날라 다시 지어

 

 

힘든 시절을 견디게 한 신앙

학동교회 장영선(85) 장로는 5대째 학동마을에 살고 있다. 자식들 교육 때문에 전주와 마을을 오가기는 했지만 마을을 떠난 적은 없다.

어릴 때는 마을에 전기가 어디 있고 버스가 어디 있고 전화가 어디 있었겠어요. 길도 없었는데요. 그때야말로 동상면은 대한민국 8대 오지였죠. 제가 5학년 때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그때 아버지가 인민군한테 학살을 당하셨죠. 아버지 장례를 모시고 온 가족이 봉동에서 3년간 피난 생활을 했어요.”

수복 이후 마을로 다시 돌아온 장 장로는 그때부터 마을과 지역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했다. 대통령 선거인단, 평화통일 정책자문위원, 동상면 지역발전위원장, 완주군청 자문위원 등 맡아왔던 직책도 많다.

마을을 떠날 새도 없었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성년이 되고 지역사회를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마을의 발전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죠.”



장영선 장로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장 장로는 나이 서른에 학동교회 장로를 맡았다. 67년부터 지금까지 50여년이 넘도록 교회와 교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의 역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봐온 셈이다. 한국전쟁 이후 마을의 모든 집들이 전소되고 교회 역시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 때도 온 마을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집보다도 교회를 짓는 데 먼저 나섰던 걸 기억한다.


교회가 불에 타서 처음에는 선교사가 쳐준 텐트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어요. 자신들이 살 집도 다 불에 탔는데 주민들 모두 나무를 베고 짊어다가 목조 건물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상상도 못할 노력이었죠.”

이후에는 나룻배를 타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하나 빠지는 사람 없이 벽돌을 옮겨 지금의 교회를 만들었다. 그때 장 장로는 20대 젊은 청년이었다. 다들 먹고 사는 게 힘든 시절이었지만 주민들에게 신앙은 큰 힘이 됐다.

그때만 해도 다들 초가집에 살았죠. 그런 시절에 동네에 붉은 벽돌 교회가 생긴 거예요. 하루하루 벽돌을 쌓아올리고 교회가 지어졌어요. 달밤에 나가서 교회를 바라보며 기쁨에 넘쳤던 기억이 나요. 늦은 봄에 완성이 됐죠.”

 

산간벽지 삶에도 감사와 축복을

학동교회는 한국전쟁 이후 수 십 년간 단 한 번도 예배를 쉬어본 적 없지만 최근에는 코로나로 2주 가량 예배를 쉬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주일에 못 모였어요. 예전처럼 기독교가 박해받는 상황이라면 절대 쉬지 않고 싸우겠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서로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조심해야죠.”



장 장로 집 안 거실에 걸려있는 사진 액자.


주민들이 고령화되고 젊은 사람들은 외지로 나가면서 교회에 오는 사람도 줄었지만 최근에 몇 가구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 장 장로는 든든하다.

젊을 땐 누군가는 지역에서 활동을 해야 발전이 된다고 생각해서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저보다 훨씬 열심히 하셨던 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말 하는 자체가 부끄럽네요. 신앙이 마을 사람들을 단합시키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거 같아요.”

장 장로는 자기본심을 지키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에 대한 감사도.

하나님이 주시고 부모에게서 받은 자기 본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 세상에 나와서 이런 벽지에서 살았지만 전 축복받은 삶을 산 거 같아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목사님, 교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장로로 지내왔다고 생각하거든요.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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