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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별곡]20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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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 듯 생각나는 게 있어 뒤적여봤더니 바로 이 즈음이었던 게다. 고산권 벼농사두레가 꾸리는 어울림 한마당 <황금들녘 풍년잔치> 말이다. 오늘 당장 준비를 시작하더라도 어차피 잔치를 벌이기는 글러버린 셈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뭉그적거린 것도 아닌데 일이 그리 되고 말았다. 어차피 그럴 형편이 못 된다는 걸 뻔히 아는지라 그저 애만 태우던 일. 참 씁쓸하다.

가을걷이를 하기 전에 <황금들녘 풍년잔치>를 벌이는 까닭이 있다. 황금빛 물결이 뿜어내는 눈부신 색감과 풍요로운 느낌, 그것만으로도 풍년을 얘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사실 풍년인지 아닌지는 수확을 해봐야 안다. 그 전에는 어쨌든 풍년이라 우기면 풍년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풍년잔치에 붙이는 설명이다.

그러나 올해는 아무리 해도 도저히 그렇게 우길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백수(白穗)현상 탓인데, 논배미를 둘러보면 볼수록 상황이 심란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들녘은 온통 황금빛으로 일렁인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거뭇거뭇, 희끗희끗한 얼룩들이 먼저 눈을 후비고 들어온다. 오랜 장마와 거센 태풍이 치여 결국은 여물지 못하고 시들고 말라비틀어져 쭉정이가 되어버린 벼이삭들.

상황이 나쁜 곳은 반타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피해가 심각하다. 누구의 눈에도 대흉작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쨌든 거둬들여 봐야 풍흉을 헤아릴 수 있다는 얘기는 벙긋 조차 할 수 없는 지경.

사실 해마다 해오던 거니 이번에도 눈 딱 감고 판을 벌여볼까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럴 기운이 생길 것이며, 설령 기운을 차려 마련한들 무슨 신이 나서 그걸 누릴 수 있겠는가 이 말이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시절이다. 지난 추석명절도 쇠는 듯 마는 듯 지나오지 않았던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풍년잔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시국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해서 우리 벼농사두레는 올해 풍년잔치를 건너뛰기로 뜻을 모았다. 하긴 중뿔날 것도 없는 일이다. 코로나19 탓에 올 한해 참 많이도 겪어오지 않았던가. 이리 따져보니 잔치를 치르지 못하는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다.

그 대신 위로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이름 하여 풍상들녘 위로마당’. 동네사람들로 북적이는 잔치판 대신 모진 풍상을 겪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다독이는 시간. 벼농사두레를 끈으로 더불어 벼농사를 지어온 농부들과 품을 내어준 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자리가 되겠다. 저마다 함께 나눌 먹거리, 위로를 전할 선물과 마음을 챙겨오라 하니 벌써부터 춤 연습하는 동영상이 단톡방에 뜬다. , 참을 수 없는 흉년의 가벼움.

비록 역대급 흉작이라 해도 농부는 논배미에 들어찬 나락을 거둬들일 것이다. 소출이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기 때문이다. 가을걷이를 위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논바닥은 잘 마르고 있는 지 살펴봐야 하고, 샘골 뚝방길에 우거진 풀도 쳐내야 한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이 달 안에 햅쌀을 만나게 된다. 흉작에 짓눌려 애를 태우는 가운데서도, 윤기 자르르 흐르고 입 안 가득 풍미가 퍼지는 햅쌀밥 나눌 그날이 기다려진다.


/차남호(비봉 염암마을에 사는 귀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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