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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목 이웃사촌] 꽃무늬 블라우스 박명선 할머니2020-09-14

[다리목 이웃사촌] 꽃무늬 블라우스 박명선 할머니

고생한 시절이라도 문득 옛날이 그리워

 

구멍가게 인수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이제는 한글공부 꿈도 이뤄

 

지난 4일 오후, 옛 공소 터 옆집.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에 핀 꽃들이 보였다. 이날 성당에 다녀온 박명선(81)할머니는 꽃무늬 블라우스를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린 햇볕에 참깨와 옥수수를 널어놓으며 어린 객을 집안으로 맞이했다.

내가 혼자 있으면 잘 안 먹게 되더라고. 이것 좀 잡숴봐.” 수박을 내오시던 할머니는 뭔가 부족해 보였는지 천마주스에 곡물을 섞어 건네주셨다.

다리목마을에서 나고 자란 명선 할머니는 스물일곱에 결혼하면서 이곳을 떠났다. 송광사 근처마을에서 지내다 전주로 이사 갔고 2002년도에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고향은 떠났어도 친정집에 왔다 갔다 하면서 몇 번씩 왔었죠. 근데 구멍가게 하시던 할머니가 자리를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거 한 번 해보고 싶더라고. 그때 다시 돌아왔어요.”

그렇게 할머니는 마을회관 옆에 있던 구멍가게 주인장이 되면서 마을로 돌아왔다. 이전에는 아파트에 살면서 시골 분위기가 그리웠더랬다. 고향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18년 된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궁금했다.

나 어렸을 땐 힘들고 무서운 일들이 참 많았어요. 일본 정치 때는 군화발 싸매고 높은 모자 쓴 일본 놈들이 와서 집안 세간살이 다 가져갔죠. 6.25 전쟁터지고 나서는 주변에 빨치산이 어찌나 많았는지. 노적골 사는 우리 외숙모도 총 맞아서 돌아가셨어요.”

할머니가 기억하는 옛날은 어둠 그 자체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연이어 겪었으니 오죽했겠나. 주변에는 억울한 죽음이 비일비재했고 어둑어둑해지면 총성 소리에 밤을 지새웠던 때였다. 게다가 어려웠던 시절 탓에 학교를 다니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고.

입학하려고 접수까지 다 해놓았는데 전쟁이 터져서 학교에 못 갔어요. 특히 우리 또래들 중에 학교 못 간 사람들이 많죠. 그뿐 아니라 시골에서 맨 날 일해야지 애 봐야지 바빴죠.”

두 번의 어려운 시기가 지나고, 할머니 집안에도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당시 명선 할머니네 아버지께서는 마을에 한지 장판공장을 크게 차렸다.

그때 마을 사람들 여럿이 우리 공장에서 종이 뜨고 한지 만들었어요. 우리 집이 이 동네서 둘째가라면 서운한 부잣집이었죠. 아버지가 자전거 타고 전주 가서 없는 것 없이 다 사가지고 왔는데 그 당시 집안에 축음기도 있었어요.”

너도 나도 고생하면서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었던 시절. 할머니는 그때가 문득 생각나고 그립다 하신다. “보리 갈아서 죽 끓여먹고 배고팠어도 마을 분위기가 참 좋았다고 말이다


 

완주군 진달래학교를 다니며 한글을 배웠다는 할머니가 학교에서 받은 상장과 시화집을 보여주셨다


할머니 인생에서 못내 이루지 못했던 꿈이 있다면 바로 글공부였다. 그런 할머니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5년 전엔가 면사무소에서 할매들 글 갈쳐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글 배우기 시작했는디 첨엔 집에 오면 다 잊어버리고 글씨 쓸라면 손에 쥐나고 힘들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희망도, 인생의 재미도 점차 사라졌다던 할머니. 완주군 성인문해 진달래학교에서 글을 배우고부터는 목표가 생기고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도 생겨났다고.

나 갈쳐준 선생은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고 했는디 어찌나 예쁘게 쓰고 싶었던지. 손이 말을 안 들어도 쓰고 또 쓰니께 쪼매 나아지더라고요.”

진달래학교 얘기가 나오자, 안방에 있는 졸업사진과 작품집을 꺼내 보여주시는 명선 할머니. 학교 다니면서 받은 상장에는 개근상, 졸업장, 초등학력인정서, 시화전 장려상이 있고 시집에는 할머니가 꾹꾹 눌러 담은 글자가 있었다.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문장마다 오색찬란하게 물들인 글 아래엔 좋아하는 꽃 그림이 가득했다.

인제 졸업했는데도 자꾸 미련이 남더라고요. 학교에서 소풍도 가고 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도 많이 받아서 좋았는데 말예요. 지나간 시간들이 꼭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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