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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내 인생은 로드무비2020-08-13

이제부터 내 인생은 로드무비

이제부터 내 인생은 로드무비

고산 성재리 이병옥, 오영순 부부



고산 읍내에 작은 영화관이 생겼다. 일주일에 네 번 영화 상영을 하는데 그때 마다 영화를 보러온다는 노부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작은 영화관 단골고객인 셈이다. 무조건 만나고 싶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사람들처럼 약속을 주고받았다. 수요일 오전에도 어김없이 영화를 보러 오실 테니 극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간단히 인사를 했다. 취재요청을 하고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우리는 금요일 오전 11시에 극장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7월의 마지막 날 텅 빈 작은 영화관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편 이병옥(73세)씨와 아내 오영순(69세)씨. 그런데 이 두 분 어디서 많이 뵌 분들 같다. 낯설지가 않다. 어디서 봤더라...


“우리 부부가 99년도부터 성재리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혹시 거기서 고시원 하지 않으셨어요?!”


일순간 서로 눈이 휘둥그레지고 저 모르시겠어요? 라는 표정과 내가 널 어떻게 아니? 라는 표정이 오고 간다. 순식간에 5년 전 어느 날로 장면이 전환 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13년까지 영업을 했었던 성재고시원.


2015년도의 어느 날, 그때도 역시나 마감을 코앞에 두고 전전긍긍하며 취재할 사람을 찾아 떠돌 던 중이었다. 천변을 헤매다가 낡은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안수산으로 향하는 마을길로 들어가니 마당이 넓은 2층 건물이 나타났는데 그곳이 성재고시원이었다. 마당 한쪽에서 주인 부부가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99년부터 시작한 고시원은 13년에 영업을 마친 상태였다. 고시원을 시작하고 10년 정도는 서른다섯 개의 방에 사법고시생 부터 온갖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로 늘 꽉 차있었다고 한다. 사법고시가 폐지되고 로스쿨이 생기면서 고시원을 찾은 이들도 뜸해지고 서서히 문을 닫게 된 것이다. 24시간 늘 긴장의 나날들이었다고 한다. 서른 명 넘는 사람들의 삼시세끼를 늘 정확한 시간에 차려 내는 일을 오랫동안 했으니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부부가 모두 일 놓고 쉬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었다. 5년 전 그 당시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반찬과 식료품을 취급하는 가게를 전주에 개업하기로 하고 한창 분주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갑자기 찾아온 나에게 고시원 운영했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주셨지만 끝내 신문에 싣지는 못했다. 먼저 인터뷰 요청을 하지 못한 나의 실수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아쉬움이 많았던 만남이었는데 5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병옥, 오영순씨의 봉고차 똘똘이. 똘똘하게 어디든 간다고 해서 이름붙였다.



다시 만난 이병옥, 오영순 부부는 한가롭게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 여유로움이 이번 인터뷰를 선뜻 허락한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고시원 접고 조금 놀다가 아직은 놀기에는 젊다는 생각이 들어서 15년부터 한 3년은 전주에서 반찬가게를 했어요. 고산에서 날마다 출퇴근하면서.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장사하고 몸이 지치더라고. 18년 7월 31일 딱 그만뒀는데 오늘이 딱 2년째네. 그때부터 논지가 2년 되는 거야. 이렇게 매이다가는 인생이 너무 허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인생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만하고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을 부부가 같이 한 거지. 그래서 열심히 놀았어요. 어차피 놀 바에는 재밌게 놀아야 된다는 생각에 노는 데만 찾아다녀요.”


이들 부부는 김제 오봉리 같은 고향 출신이다. 고향사람의 중매로 75년에 식을 올리고 전주에서 삼남매 낳아 키우며 평생 각자의 일을 쉬지 않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없이 스스로 일으키는 삶이었다. 이병옥씨 말로는 부부가 호흡이 잘 맞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나하고 결혼하고 집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계속 부업을 했어요. 업적이 굉장히 많아요. 이 사람은 일을 계속 저지르는 사람이야. 나는 계속 똑같은 직장을 다니면서 고정된 수입이 있으니까.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수월하게 진행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뒤에서 정리를 하는 스타일이고. 처음에는 일을 너무 저지르니까 감당하기 어렵기도 했는데 이 사람이 저질러놓고 보면 소화를 잘 하더라고. 그래서 나중에는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뒤에서 도와주는 일을 한 거지.”


오영순씨는 스무살부터 스스로 돈을 벌던 사람이었다. 손재주가 좋아 전주 남부시장 건너편에서 작은 의상실을 운영했었다고 한다. 아래로 동생이 여섯이나 되었고 막내둥이들은 의상실 하며 번 돈으로 보살피며 학교를 보냈다.


“그때 의상실이 샛별의상실이었어요. 아가씨시절에 하늘의 별을 보면서, 샛별은 다른 별 다 없어져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잖아. 그 생각으로 이름 지은거야.”



주민센터에서 컴퓨터를 비롯해 장구, 난타를 배우고 있다.


결혼하고 나서는 하숙집, 신발가게를 운영하면서 모은 돈으로 송천초등학교 앞에 건물을 지어서 문구점을 했다고 한다. 그때 문구점 이름도 샛별문구점이었다. 그때는 학생 수가 많아 장사가 잘 되었고 금리가 좋았던 시절이어서 은행에 돈을 맡겨두면 금세 돈이 불어났다고 한다. 3~4년 운영하던 문구점은 세 내주고 바로 위층에서 탁구장도 운영하셨다고 한다. 탁구장 운영하면서 종합경기장 앞에 세 얻어서 고시원도 운영하셨다고 하니, 남편 이병옥씨의 일 저지르기 선수라는 표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도 80~90년 경기 좋았던 시절에 오영순씨가 저질렀던(^^) 여러 일들 덕분에 지금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하신다.


90년대 후반 IMF 영향으로 명예퇴직 붐이 일자 이병옥씨도 51세 이른 나이에 평생직장을 은퇴하게 되었다. 전부터 노후는 시골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부부가 함께 했다고 한다. 은퇴하기 전에 사놓았던 성재리 땅에 고시원 건물을 짓고 99년에 완주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오영순씨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먹고 살기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했고 이제는 정말 신명나게 놀고 있으니 말이다. 몸 성히 움직일 수 있는 시기가 한 십년정도 인 것 같다며 봉고차 ‘똘똘이’를 캠핑카 삼아 목적지 없이 9일 동안 강원도 여행을 한 경험담도 이야기 해주셨다.



완주미디어센터 영화상영관에서 만난 부부는 두손을 꼭 잡고 웃고 있었다.


“행복이란 것은 내 여건에서 찾아야 하는 거지 새롭게 만들긴 힘들어. 영화 보러 나오는 것도, 오전 10시에 영화시작 하니까 아침에 집안일 각자 하고 이 사람이랑 마당에서 9시 40분까지 나와라 약속을 해요. 거기서 손잡고 같이 차타고 나와서 영화를 봐요. 이런 것들이 소소하고 작은 일이지만.. 행복감을 이런 것에서 느끼는 것 같아요. 도전해서 뭔가를 이뤄내는 큰 성취보다는 이런 과정이 좋아요. 너무 멀리 있는 것 보다 가까이에 있는 거.”


이병옥씨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데이트 하듯 약속을 하고 마당에서 만나 영화 보러 나오는 그들의 봉고차를 잠시 뒤따라갔다. 순간 로드무비의 한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영화가 별거 있나, 우리들 삶의 순간들이 모두 영화지.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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