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장미경의 삶의풍경

"내가 사는 마을인데 내가 지켜내야지"2020-02-11




저 서방산을 지키려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 용진면 신촌마을 정도순씨와 동네 할머니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각, 감정, 말을 들으며 느낀 것은 이 세상에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기록된 적이 없는 사람들의 흔적과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하게 되어 새삼스럽게 자부심을 느낀다.

추워질 기미가 없는 어느 겨울날, 미루고 미루던 용진면 운곡리 마을조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운곡리의 신촌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러 가지를 묻고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에는 신기촌이라 불리던 곳. 녹두밭 웃머리 자갈 많은 험한 땅을 일궈내며 참 가난한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들이다.

 

정도순씨는 할머니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회관에 누워 계신 할머니들을 불러세우고야 만다.


그러다가 2004년 마을에 닥친 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개발업자의 석산개발로 환경피해와 산림훼손, 주민생존권을 위협하는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이곳저곳에 걸려있던 석산개발 반대 현수막을 본 기억이 번득 스쳐지나간다. 16년이 지난 일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당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촌마을과 두억마을, 용진면 주민들, 지역 내 종교 및 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서방산 봉서골 석산개발 반대 대책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26개월 동안 천막농성이 이어졌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그 당시 치열했던 집회 현장과 협약체결 마무리 과정에 대한 많은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집회 현장에 앉아 소리치고 있는 이름 모르는 할머니들의 표정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정도순씨(65)는 그 당시 신촌마을 부녀회장이었다. 마을을 지켜야 된다는 일념으로 앞장섰고 석산개발 진입로에 천막을 짓고 마을 주민들이 조를 나눠서 밥해먹고 그곳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내가 법원 재판장도 엄청 불려 다녔어요. 개발업자 측에서 사진 찍어서 불법 시위한다고 신고하고 내야할 벌금도 엄청 났는데 봉서사 스님들하고 서철승 신부님이 마을에서 바자회를 열어서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벌금도 내고 재판도 하고 그랬지. 그런 난리가 없었어. 집회한다고 쫓아다니고 기자회견한다고 쫓아다니고, 그때 환경운동연합 이정현씨가 참 애를 많이 썼어. 자다가도 사이렌 울리면 동네사람들이 다 쫒아 나가서 포크레인 바가지에 동네 할머니들이 들어가 앉아 있고 길바닥에 눕고 그랬어. 26개월을 그 짓을 했어. 우리같이 못할 걸. 우리는 목숨 걸고 했어.”


 

2년6개월동안의 기록. 천막농성 당시 마을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생활했던 것을 기록한 지출장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시골사람들이라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고, 그것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목숨 걸고 지켜낸 우리 마을

신촌마을 할머니들은 용진면에서 정도순 모르면 간첩.’라며 그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번개처럼 날라 다니던 정도순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정도순씨는 21살 때 익산 춘포에서 이곳으로 시집왔으니 44년을 신촌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다. 똑소리 나던 새색시가 4남매를 낳고 남편과 복숭아 과수원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사나움 한 번 피지 않던 사람이었다. 어디 정도순씨 뿐이었겠는가. 그저 억척스럽게 험한 땅 일구며 살아가는 순하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싸낙배기가 되었다.


요즘도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든 달려간다는 정도순씨.


내가 나이는 어려도 대장이야. 할머니들이 내 말을 잘 들어주니까.(웃음) 내가 원래 사나운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석산 반대하면서 싸낙배기가 되어버렸지. 개발업자들이 경찰 데리고 와서 포크레인으로 파내버린다고 위협하니까 순하던 사람도 욕만 남더만. 욕도 말도 못하게 했어! 생전 욕도 안 해 본 사람들이. 지금은 다시 순한 양이 되었지.”

 

정도순씨의 말에 할머니들은 그려, 그려. 잘한다!’ 맞장구를 쳐주신다.

 

동네 할머니들이 나를 안아줬어. 그래서 일어선 거야

서방산 석산개발 반대 집회가 시작되었던 2004년은 정도순씨 자신의 삶에서 고난이 많았던 해였다. 한참 모내기 하던 때 손가락을 다쳐 절단 수술을 받았고 하루에 진통제를 20~30개씩 삼켜가면서 일을 했지만 다른 손가락에도 염증이 생기면서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모내기 다 끝내고 8월에 대학병원을 간 거지. 바로 입원시키더라고. 전신성경화증이래. 합병증으로 루푸스, 루마티스 관절염까지 왔다고. 그때 병원에서 오래 못산다고 했어. 고생만 엄청 하다가.. 몇 달 뒤에는 아기 아빠가 조경일 한다고 보라매 공원에 큰 소나무를 복구하러 갔는데 오후 4시쯤 전화가 온 거야. 서울 병원으로 갔더니 나를 시체안치실로 데리고 들어가더라고. 동네가 발칵 뒤집혔어. 내가 정신도 많이 잃고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나를 많이 안았어.”

 

나는 계속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냐고. 자신의 병과 남편의 죽음을 잠시 묻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냐고. 밀고 들어오는 포크레인 앞에 서고, 소위 배웠다고 하는 높으신 양반들을 찾아가 앞장서서 소리를 지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냐고 계속 물었다.

 

슬픈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더 한 거야. 이겨내고 싶어서. 마음을 집중하니까 슬픈 생각을 잊어버렸지. 아기아빠 죽었다는 것도 못 느꼈어. 동네를 지켜야 하니까 그런 슬픔이나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지. 그래서 할머니들이 고마워. 나를 안아줬으니까 내가 혼자되었어도 이렇게 살잖아.”

 

정도순씨는 석산반대집회가 없었더라면 오히려 더 힘들었을 거라고 말한다. 26개월, 온 힘을 다 쏟아 붙는 동안 곁에서 함께 한 마을주민들 덕에 아픔과 슬픔이 치유되었다.


뒷 마당에서 서방산을 바라보는 정도순씨


이제는 갈아먹던 땅도 세내 주고 사남매 키워 다들 잘 살고 있으니 아쉬울 것 없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병도 아니니 마음을 비우고 한 달에 한번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는다. 대부분의 시간은 마을회관에서 이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정도순씨는 요즘도 어딘가에서 산을 파헤친다는 소식이 들리면 오토바이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 기어코 그 산을 보고 온다고 한다. 먹고 사느라 배운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다. 하지만 이제는 할 말이 있으면 하고야 만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겪은 큰 사건 덕에 자신의 의식 속에 새로운 눈이 생겼다. 이제 그들에게 산은 새롭게 보이는 산이다.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마음속에 단단한 것을 품고 서로 의지해 살아간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쪼깐하고 오래된 읍내의 국수가게
다음글
아랫지동리 터줏대감의 세상읽기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