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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수리공의 41년2019-10-15

시계수리공의 41년




시계수리공의 41

고산면 중앙사 구근회씨

 

터미널 맞은편, 8평 남짓한 이 가게에서 반나절 앉아 있다 보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버스와 온갖 차들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오고 간다. 문이 열리면 땡그랑 종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들어옴을 알린다. 편안하게 낡은 옷을 입은 어르신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다. 금빛 손목시계다. 언제부터 흐르기 시작한 시계였을까. 주인장과 손님은 얼마나 오래된 관계일까. 주인장은 시계를 받아들고 오래된 의자에 앉아 오래전에 배운 기술로 지금의 시계를 고친다. 멈춘 시계가 되살아 날 동안 시계주인 어르신은 나에게 이 가게를 소개한다.



사람은 아프면 병원에 가고 시계가 아프면 여기로 와야지. 여기가 시계병원이야.”

 

중앙사는 고산읍내의 유일한 곳이다. , 은을 비롯한 보석과 시계를 판매하면서 각종 시계를 수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몇 해 전부터는 소일거리로 도장 파는 일까지 겸하고 있다. 중앙사의 주인 구근회씨(71)41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가게가 두세 곳 있었지만 지금은 중앙사 한 곳만 남아 있다. 1978년 고산읍내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맞춘 작업대, 의자, 여러 가지 작업도구들 모두 41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내 고향은 원화정마을이야. 19살에 서울로 올라갔지. 누나들이 내 인생의 길잡이를 많이 해 줬어. 여기 있으면 똥지게밖에 더 들겠냐, 뭐든 기술을 배우라고 인생을 이끌어 줬지. 올라가서 주로 몸 쓰는 일을 많이 했지. 전기 다루는 기술도 배우고, 목수일도 하다가 떨어져서 다치기도 하고. 명동에 있는 코스모스 백화점 짓는 곳에서 일하다가 전기 감전 돼서, 같이 일한 동료 여럿 죽었어.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성모병원에서 2개월 동안 입원해있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지.”

 

위험한 일을 겪고 나니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가 겁이 났다. 혼란스런 스무 해의 어느 날, 터벅터벅 걷다가 불빛 밝은 종로 어느 길가에서 걸음이 멈췄다고 한다. 훤한 불빛 아래서 깨끗한 옷을 입고 금세공 하는 기술자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했다. 귀금속 관련된 곳에서 대체적으로 시계를 취급하기도 했고 60~70년대는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80년대 들어서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시계 수리업도 황금기를 맞았다. 구근회씨는 방황하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계 학원으로 향했다.


 

중앙사 구근회씨의 오래된 금 가공 장비들.


“72년도 이리(익산)로 내려와서 시계학원을 다녔지. 그 당시는 시계공이 유망직종이었어요.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고 그 일을 배운 거지. 학원비를 대야 하는데 누님들이 도움을 많이 주신거지. 우리 자식들에게도 많이 이야기해. 고모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먹고 사는 거라고. 학원에서 먹고 자며 하며 2~3년 기술 배웠지. 시계를 수없이 뜯었다 조립했다를 반복하며 기술을 연마했지. 시계가 귀한 시절이었지. 그 당시에 고급기술이었지요.”

 

그 당시 시계학원 근처에서 금 가공하는 어르신에게 고급기술을 전수 받기도 했다.

 

“75살 드신 할아버지였어. 일제시대 때부터 금은 장사를 하시던 분이었는데 금 가공하고 분석하는 것은 아무나 안 알려 줬거든. 내가 옆에서 허드렛일 많이 도와드렸더니 나를 예쁘게 본 거 같아. 그래서 기술을 전수 해주신 거지. 그 당시 내 나이 24. 1년 정도 남의 집에서 직원 하다가 내 가게 했지.”

 

75살 할아버지는 풋풋하던 구근회씨에게 평생 먹고 살 기술을 알려 주셨다. 원석에 박혀 있는 금을 채취하기 위해 망치로 두드려 잘게 부스고 물에 걸러내면 참깨만한 크기의 금 알갱이들을 얻을 수 있다. 그 알갱이의 불순물(, 구리 등) 을 제거하고 순수한 순금을 얻기 위해 초산분석, 왕수분석 작업을 해야 한다. 초산, 염산 등 화학약품을 다뤄야 하고 약품들의 비율을 맞춰야 하는 정밀한 작업이다. 구근회씨는 그 당시 금 가공하던 작업설비들을 보여주셨다. 분석 작업할 때 연기 빠져나가는 굴뚝의 흔적, 금을 녹여서 붓는 거푸집, 섬세하게 다듬는 끌, 운주 금당리 금광(현재는 폐광)에서 채취한 금이 박힌 원석. 현재는 건강상의 이유로 금 가공하고 세공하는 일은 줄이고 있지만 방금 전까지 해오시던 일처럼 모든 설명이 생생하다.

 

그 당시에 시계방이랑 금은방 혼자서 다 같이 하는 사람 드물었어요. 금을 가공하는 가게로는 최초였지. 나는 집에서 작업할 수 있거든. 서울 같은 곳은 모든 작업이 분야별로 분업화 되었잖아요. 근데 우리처럼 작은 가게가 이문 남기려면 완제품을 만들어 내야만 하잖아. 그래서 모든 분야를 내가 다 할 수 있죠.”

 

고산면내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잘 나가던 시기는 비슷할 것이다. 고산뿐이겠는가. 70년대부터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밤낮없이 일하고 경제성장을 위해 달려갔다. 장사도 잘 되던 시기였다. 80년대 초에서 IMF가 오기 전까지. 그 당시에는 별 실감을 못 느꼈는데 차츰차츰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는 반지나 목걸이 차고 다니면 창피하던 시절이었어요. 나라가 빚이 많아서 국민이 금모우기 운동에 동참했었잖아요. 한창 바쁠 때는 낮에 망치질 하면서 금 작업하고 저녁에는 시계수리 작업하고 그랬지. 예전만 못해도 계속 찾아주는 손님이 있으니까 나도 아직 몸 건강하니까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 


 

 

중앙사 가게정문이 아스라이 비추는 벽시계.(고산고 송윤성 제공)


구근회씨의 중앙사는 41년의 세월 동안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 또한 40년 지기 단골들이다. 서로 욕심을 버려야 신뢰가 쌓이고 관계가 지속되는 법이다.

 

손목에 태엽시계 차고 자랑스러워하던 시절이 지나고 전자시계가 등장했다. 저렴한 시계들이 넘쳐나면서 고쳐서 쓰는 사람들이 드물어진다. 2~3년 쓰면 오래 쓰는 거라고 하니 거의 일회용물건 아닌가. 이런 시대에 여전히 오래된 시계를 가지고 찾아오는 이가 있고, 그것을 기꺼이 수리하는 시계수리공의 모습은 고전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스럽다.

지나치게 빨리 달려왔고 많은 것이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지금보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서랍을 뒤져 고장 난 시계 하나를 찾아냈다. 중앙사의 종소리를 울려야겠다.

 

* 본 인터뷰는 고산고등학교 LTI프로그램에 참여하는 2학년 송영웅, 송윤성, 류상화와 함께 진행했습니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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