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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쟁이 막내딸의 소박한 치유법2019-09-19

바느질쟁이 막내딸의 소박한 치유법


바느질쟁이 막내딸의 소박한 치유법


시골에 와 보니 여기야 말로 살아있는 대학

병들고 지친 사람들 치유하는 것 돕고 싶어

- 고산면 이현귀씨


아파야 산다는 말이 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아픔 속에 삶의 이유와 조건이 담겨져 있고 그것으로 인해 결국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몸도 마음도 우리는 대부분 크고 작은 아픔들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 되던 해 겨울, 단돈 삼천원을 들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던 이현귀 해설사(63. 완주군 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준 삶의 풍경은 아픔을 드러내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여정이자 새로운 삶의 근거를 만들어 가는 치유의 이야기들이다.


 

우리 엄마가 토요일만 되면 멀쩡한 이불을 뜯었어요. 그러면 삶아서 풀 먹이고 다듬이질 하고 꼬매야 학교를 가잖아요. 책 못 들여다보게 시간을 뺏었어. 딸이라고 안 가르친다고. 어린마음에 집에 있으면 일만하다 끝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간다는 생각 때문에 그 고마운 엄마가 미워지더라구요. 엄마는 공부 못하게 책 뺏고 저녁이 되면 불을 못 켜게 하고 그랬어요. 중학교 시험보러 가는데 내 뒤꼭지에 대고 저년은 보나마나 떨어질거라고 그랬어요. 나 기죽이느라고.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씩씩거리면서 시험을 보러 갔지요. 그 어느 누가 너 시험 잘봤냐 물어보는 사람 없었어. 가족들이 아무도 관심도 없었지. 내 번호가 162번이었어. 학교 합격되었다는 소리 듣고 우리 엄마는 근심걱정인거지. 저것을 어떻게 가르치나 하고.”

 

그 고마운 엄마가 그렇게까지 막내딸이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는 것을 못하게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집과 전답을 처분했고 엄마의 바느질 품팔이로 살림을 이어갔다고 했다. 가르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으니까 자식들에게 더 모질게 대한 것이다. 이현귀씨는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셋째 언니가 친척에게 몰래 얻어다 준 삼천원을 들고 둘째 언니가 자리 잡고 있는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 때는 중학교 졸업하면 공장에 들어갔고 초등학교 졸업하면 식모살이 했어요. 그게 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었어요. 아침 일찍 출근해서 새벽까지 일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 어린 것들이 다 그런 일들을 했어요. 그때는 서울만 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어요. 기차타고 갈 때 눈이 내렸던 기억이 나네요. 와이셔츠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와이셔츠 실밥 떼는 일. 내가 솜씨가 좋으니까 와이셔츠 포장하는 일을 하게 되었죠. 샘플실에서도 일하고요. 내가 엄마 닮아서 솜씨가 있어요. 우리 엄마가 그 당시에 마을에서 폐백음식을 다 했어요. 고산 읍내에 바느질쟁이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에 우리 엄마가 인기가 제일 좋았어요. 고향에 다시 내려왔을 때 고산 양로당에 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나를 소개하기를 바느질쟁이 막내딸 하니까 다 나를 알아보시더라구요.”

 

서울살이는 솜씨 좋고 욕심 많았던 그녀를 서서히 병들게 했다. 스물넷에 수원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둘째를 낳고 나서부터는 몸의 반쪽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잘 맞지 않았던 서울살이와 힘들었던 결혼생활로 인해 그녀의 몸에 당시에는 병명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류머티스 관절염이라는 퇴행성 질환이 찾아온 것이다. 병원을 전전하고 너무 힘들 땐 모진 생각도 했지만 우연히 읽은 한 권의 책이 그녀를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유태종 박사가 쓴 책을 읽었는데 마트에서 파는 된장, 고추장 먹어서는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 그래서 시골에 가자. 고향에 가서 콩 농사지어서 고추장 된장 담가서 살자 마음을 먹은 거에요. 마흔두살 때였어요. 그때 오산리에 땅을 샀어요. 그 땅에 매실나무가 600주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 별명이 매실아줌마가 된 거에요. 그때 내려올 때만 해도 우울증이 심했어요. 그런데 매실나무 600주 가꾸다 보니까 매일 나무랑 씨름하고 나무들이랑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몸도 건강해지니까 밖에 나와서 일할 생각을 한 거죠. 쉰 넘어서는 완주문화원을 통해 문화관광해서 일을 시작해 십년 넘게 하고 있어요.”


 


이현귀씨는 완주군에서 내로라하는 마당발이다. 로컬푸드 직매장에 납품하는 농부이고 삼례문화예술촌에서 활동하는 문화관광해설사이고 봉동, 운주, 화산, 고산에서는 소문난 요가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관광, 공동체, 로컬푸드를 비롯해 최근 지역에 만들어진 새로운 정책이나 사업을 공부하는 자리에는 빠짐없이 함께 했다. 지금은 농업대학에서 농업치유체험과정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십년 동안은 수원하고 완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다 2009년에 보따리 싸서 완전히 정착한거죠. 문화관광해설사 시작하고 요가 강사도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요가가 익숙하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둔산리 코아루 아파트 경로당에서 처음 시작 했는데 어르신들 요가 수업하러 가면 노래수업이나 하자고 그러던 시절이었죠. 요가 시작한 것도 제가 아파서 시작 했어요. 요가를 배우니까 몸도 좋아지고 마음이 참 편해졌어요. 남들은 내가 어디 아프다고 하면 안 믿어요. 그런데 제가 심장도 안 좋고 운동 안하면 몸이 금방 굳어져서 꾸준히 관리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완주군에서 교육받고 그랬던 것이 지금의 밑거름이 된 거 같아요. 제가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시골에 와보니 이곳이 대학이에요. 살아있는 대학. 지금도 시간만 나면 농업대학을 다녀요. 농업치유체험과라고 있어요. 나처럼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 오면 내가 치유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어요.”


 


이현귀씨는 그래도 밭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상처받고 지치기 마련이다. 바깥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밭으로 들어가 일을 한다고 한다. 다행히 친구처럼 다정한 딸과 듬직한 사위가 함께 살고 있어서 각자의 일은 따로 있지만 농사만큼은 함께 짓고 같이 갈무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완주군과 더불어 살아가며 얻게 되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제법 많다. 산과 강, 들판과 마을의 풍경도 참 좋지만 식탐이 많은 나로서는 로컬푸드 직매장에서의 장보기를 그 즐거움에서 빼놓을 수 없겠다. 직매장에는 제철에 생산되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쌓여 있고 온갖 종류의 곡물과 산야초가 구색을 맞춰 진열되어 있다. 냉장 쇼케이스에는 어디서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 모르는 음료 대신 완주군 주민들이 조금씩 생산하고 가공해 낸 건강한 가공식품들이 짜임새 있게 채워져 있다. 뭐든지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에 완주군에서 시작한 로컬푸드 직매장 시스템이 제대로 정착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완주에서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만들어지는 직매장이 대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직매장에서 파는 상품들에는 이현귀씨처럼 소박하지만 스스로를 치유하고 다른 이들을 함께 돌보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진짜 이름들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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