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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묵신한 목화솜 이불2018-03-05

할머니의 묵신한 목화솜 이불


할머니의 묵신한 목화솜 이불

서봉마을 박영희 할머니


목화농사 짓던 시집에서 첫 인연
유머많던 할아버지와도
솜이불 속에서 티격태격 사랑쌓아
 
딸 둘 시집보낼 때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동네아낙과
이불 직접 만들어 혼수로 보내




우리 집에도 목화솜 이불이 있었다. 엄마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온 이불이었다. 봉황이 새겨진 빨간 공단에 하얀 홑청을 씌운 이불. 추운 겨울날 실컷 놀다 들어와 그 묵직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씻고 자라는 엄마의 꾸지람, 9시를 알리는 뉴스소리, 동네 개짓는 소리 따위는 아득히 멀어지며 금세 잠이 들곤 했다.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그 이불이 귀찮았다. 세탁한 홑청을 다시 씌울 때는 좁은 거실에 이불을 옹색하게 펼쳐놓고 엄마랑 마주앉아 꿰맸는데, 그것이 하기 싫어 몸이 베베 꼬이곤 했다. 그 뒤 가뿐한 핑크색 오리털 이불을 얻게 되면서 내 기억 속의 목화솜 이불은 사라졌다. 서봉마을 박영희 할머니의 장롱에 있던 30년도 넘은 목화솜 이불을 보고 만지고 나니 어린 시절 작은 몸을 누르던 솜이불의 아득한 묵신함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전라도 말로 묵신하다고 말하는 것이 목화솜이불에 더 잘 어울린다.



이불깃을 꾀매는 박영희 할머니. 목이 닿는 자리에 천을 덧대거나 수를 놓아 이불깃을 만들었다. 이불깃이 없는 이불은 벙어리이불이라고 불렀다.



한 이불 덮고 산다는 것
박 할머니의 고향은 서봉마을 큰 동네다. 뒷산 근처 안 터에 살던 네 살 위 동네 오라버니랑 한 동네에서 정분이 나 식을 올린 뒤 쭉 이곳에서 살고 계신다. 77년의 세월이다.


“저 양반이 지금 생각해도 유머가 참 좋아. 젊었을 때도 말을 참 잘했어. 물레방앗간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거기로 나가서 연애를 했지. 지금 마을 앞 버스승강장 앞에가 서봉방앗간이라고 있었거든. 난 할아버지한테 여지까지 여자라고 천대받은 일이 없어. 내도 그 뜻을 다 받아 주었으니 또 싸울 일이 없었지. 남들한테 저 집 싸운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안 들었으니까. 애들 보는 데서도 싸우면 안 돼. 내가 애들도 이남 이녀로 섞박아 잘 낳았는데 지들끼리도 싸움 한 번 안하고 잘 크데. 할아버지랑도 정 싸울 일이 있으면 밤에 솜이불 덮고 남들 안 들리게 이러내 저러내 했지. 그러고 나면 다 풀어져.”


열아홉에 시집왔더니 시댁식구는 열두 명이었다. 박 할머니 말로는 솜이불 하나로 열두 명이 덮고 자는데 거기서 애기도 만들고 그랬다며 크게 웃으신다. 그런 세월을 살았노라고. 지금은 부엌에서 밥하라고 하면 눈 감고도 하겠다 하신다. 열 두 식구 매끼 밥 해 먹이고 빨래하고 농사짓고, 고생스러운 일이었지만 새 각시 적 할머니는 재미로 알고 그 세월을 보내셨다.


“나 살아온 이야기 하면 지금은 아득 혀. 그래도 식구들 밥 해먹이고 그런 것이 재미있더라고. 바깥양반은 면사무소에서 일했는데 그 월급으로 열두 식구가 못 사니까 나는 큰집 논일 밭일 하면서 놉을 받았지. 날만 새면 큰집에 애 맡겨놓고 일하고 다녔어.”


이불도 예쁘지만 잘 자라준 사남매가 제일 예쁘다.




개미처럼 일해서 조금씩 번 돈을 예금하고 동네아낙들과 쌀 계를 하면서 목돈을 모아 76년도에는 안 터에 집을 사서 여태껏 살고 있다. 시골의 옛집을 부수고 비슷한 집들을 새로 지어내 동네의 옛 정취가 사라졌지만 박영희 할머니와 이인환 할아버지의 집은 옛 모습 그대로다. 자녀분들이 집을 새로 짓자고 해도 할아버지는 한사코 마다하신다. 노부부의 집 구석구석에는 오래된 물건이 가득하다. 박 할머니의 친정어머니가 사용하던 절구통, 됫박부터 다듬이질 하던 돌과 방망이, 할아버지가 만드신 닳은 싸리비, 확독, 오래된 사랑채, 창고 등 대부분의 것이 그대로다. 장롱 속의 목화솜 이불과 사십여년 전 할머니가 농사지어 수확한 하얀 목화솜도 그대로다.


새각시 적 내 몫으로 나온 밭에서 목화를 심다
시집와서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밭을 일구고 작물을 키웠던 것은 목화 농사였다.


40여년전 직접 농사지은 목화솜.




“시집와서 봉게는 시어른들이 목화농사를 짓고 있더라고. 지금 정거장 맞은편 강변있잖아. 예전에는 거기서 농사를 많이 지었어. 새각시 때 새참을 들고 가곤 했지. 하루는 밭을 만들어 놓고 시부모님이 나한테 ‘야 너 이거 가져라’ 그랴. 새참 가지고 다닐 적만 해도 밤낮 봐야 어떤 것이 우리 밭인지 모르겠더만 ‘너 이 놈 가져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 딱 박혀가지고 이게 내 밭이구나 하고 알아지더라고. 처음으로 내 손으로 목화농사를 지어본 거지. 예전에는 사람들 소변을 모아 놓은 통이 있었거든. 그 소변을 오래 묵혀놨다가 그거를 목화씨랑 버무리더라고. 개미가 물어가지 말라고. 벌레도 덜 끼고. 목화는 밀하고 보리하고 올라와서 막 여물기 전에 심었어. 옛날에는 밭 매다가도 익기 전의 목화를 따먹었는데 참 연하고 다달보래 해. 그럼 어른들이 목화 다 따 먹냐!! 혼을 냈지. 근데 우리는 하나씩 따 먹었쌈서 웃는 거지.”


여름 철 꽃이 활짝 폈다가 가을이 되면 솜이 하얗게 부풀어 오른다. 앞주머니를 찬 동네 아낙들은 하얀 솜을 따서 주머니 속에 넣는다. 설이 올 때까지 안 익은 목화는 줄기 째 끊어서 밭 한쪽에 모아서 놔두면 피기도 하는데 솜이 새하얗지가 않아 그런 것을 따로 모아 애들 깔이불을 만들었다. 티 없이 새하얀 솜만 수확해서 마당에 대나무 발을 펼쳐놓고 말려야 한다. 새벽이슬을 맞춰가면서 밤낮 며칠을 말려야 속까지 조직이 단단해지고 색이 더 하얗게 된다고 한다.


“잘 말랐는가 어떻게 아냐면 솜에 달려 있는 목화씨를 이빨로 눌러봐. 딱 소리가 나면서 쪼개지면 잘 마른거야. 잘 마른 솜을 큰 항아리에 포개서 보관하고 그랬지. 그러다가 딸 여윌 때 꺼내서 솜을 타지. 물레방앗간에 뭉슬뭉슬한 솜을 가져가면 씨아(목화솜 빼는 것)에 넣고 씨를 빼내. 그 씨를 받아다가 내년에 또 심고. 씨 뺀 솜을 판판하게 펴는 것을 솜 탄다고 그래. 판판해진 놈을 개끼면 완성이야. 그걸 가져와서 집에서 이불 만드는 거지. 보통 좋은 이불 하려면 솜 세 채는 있어야 해. 한 채가 지금으로 말하면 열다섯 근.”


첫 딸과 둘째 딸 여윌 때 할머니는 집 마당에 멍석을 있는 대로 깔고 동네 아낙들과 모여 정성스럽게 이불을 만들었다. 솜이 뭉치지 않게 교차해서 포개는 것을 대여섯 번을 쌓아야 한다. 이불 속싸개를 만들고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홑청위에 올려 색 고운 빨간 공단을 입히고 이불깃은 초록색으로 맵시 있게 마무리 한다. 지금은 보기 드문 풍경일 테다.


박영희 할머니는 막내 딸 혼수품으로 만들고 남은 목화솜이 이제 쓸데가 없다며 우리에게 주셨다. 함께 간 동네친구와 그의 어린 딸을 보고 마음이 동하셨을까. 머뭇거리던 우리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 귀한 것을 받았다. 할머니가 젊은 시절 농사지어 수확한 솜이다. 우리보다 나이가 더 많은 목화솜을 이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친구와 그의 딸과 함께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이 어린 아이가 나중에 시집을 간다고 할 때, 그때 우리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묵신한 목화솜 이불을 만들어 보자고.


목화 농사를 짓고 솜이불을 만들고. 사남매의 어예쁜 자녀들까지 키워낸 박영희 할머니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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