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기획특집

> 이달 완두콩 > 기획특집

[만수동 사람들] 스스로 '복 받은 마을' 2015-10-06

[만수동 사람들] 스스로 '복 받은 마을'

▲ 추석 연휴 고향을 찾은 자식들을 보낸 뒤 만수동 사람들은 일로 허전함을 달랬다. 힘든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정영모(74)-강춘자(72)씨 부부가 낯선 카메라 앞에서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짓고 있다.

 

날이 흐렸다. 대전으로 가는 17번 국도를 타고 경천면 용복리를 지나던 중 작은 표지판을 만났다. ‘만수동(萬壽洞) 0.9km'. 도로가에서 차를 돌려 원용복 마을을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작은 독립기념관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서부터가 이 만수동(萬壽洞) 마을의 시작이었다.

 

만 명을 살린 골짜기, 만수동(萬壽洞)


“전쟁 때였어. 여기가 산이 깊은데, 산과 산 밑에 터가 있었대. 거기에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숨어있었다지. 그때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살린 거야. 이 마을이.”
그래서 붙여진 마을 이름 만수동(萬壽洞). 이 만수동에는 모두 27 가구가 산다.


마을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산의 막바지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 산막마을이 나오는데, 이 곳까지 합쳐 행정구역상 ‘만수동’이라 불린다.

 

▲ 산막마을에 사는 부부가 밭일을 하고 있다.

 


만수동은 둥근 형태의 다른 마을과 달리 산 밑으로 길게 펼쳐진 마을이다. 그 만큼 농지도 넉넉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유독 고요하고 평온한 느낌이다.


“매봉재하고 성재가 마을 바로 뒤에 있어. 옛날엔 저 산 넘어 화산면으로 넘어가고 했었지.”(최광준.70)

마을의 평균 연령은 70세. 마을의 가장 큰 어르신이 92살, 막내가 55살이다. 유중현 할아버지는 같은 92세 양갑례 할머니보다 생일이 빨라 이 마을에서 가장 웃어른이다.


“내가 이 마을에서도, 경천면에서도 나이가 젤로 많을 거여. 며칠만 있으면 93살 올라가.”(유중현.92)


 

▲ 만수동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유중현 할아버지

 

 

만수동 초입에서 마을의 끝인 산막마을까지는 산모퉁이를 돌아 한 참을 더 가야해서 같은 마을로 들어가지만 꽤나 멀다. 천천한 걸음으로 10분이 훌쩍 넘는다. 마을의 끝으로 향하는 길, 홀로 나무 아래에 앉아 대추를 줍던 어르신을 만났다.

“집어 잡수가. 봉투 같은 거 없나. 저기 크고 깨끗한 놈으로 가져가요.”(김완태.77)


난생 처음 본 객에게 때깔 좋은 대추 한 움큼을 쥐어준다. 그 마음이 고맙고 정겹다. 큼직한 대추를 주머니에 울룩불룩 넣고 떠나는 순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와요.”

 



김완태 어르신이 대추 한 움큼을 선뜻 쥐어주신다.


감 따는 계절 가을


만수동 사람들에게 가을은 ‘감 따는 계절’이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고, 마을이 가장 소란스러워지는 시기다. 마을은 지금 그 소란스러움을 맞이하는 채비를 하고 있다.


“여기가 고추 심었던 땅이여. 덕장을 이리 옮길라고. 덕장 방향이 잘못돼서 작년에 감 농사가 잘 안됐었어.”(장옥석)


감을 말릴 때 쓰는 덕장을 옮길 터를 닦고 있는 장 할아버지. 나이가 무색하게 날카로운 쟁기날이 돌아가는 경운기를 고집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감은 예민하다. 감나무 키우는 일이 ‘사람 애기 키우는 일’ 보다 어렵다고 할 정도다. 바람, 햇빛, 비 어느 것 하나 부족해서도, 넘쳐서도 안 된다.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감 따는 시기가 조금 앞당겨질 거 같다. 여름 내 비가 부족했던 탓이다.


“곶감 깎고 나서 2주간은 비가 안 와야혀. 감 껍데기 마를 동안은. 그동안은 비가 이틀만 와도 다 망해버려. 올해는 날씨가 좋아야 될텐데.”(정영모.74)

 

 ▲ 만수동에는 감나무가 많다. 가을이 되면 감일로 가장 바빠진다.

 

40가구가 훌쩍 넘었던 옛날의 만수동

 

옛날 이 마을은 90%이상이 벼농사를 짓던 마을이었다. 마을에 농사일을 할 사람이 줄어들고, 돈이 되지 않자 사람들은 하나둘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옛날엔 구제리, 가천 사람들이 다 여기 쌀 팔러(사러)왔었어. 예전엔 여 앞이 다 논이었지. 지금은 힘들고 돈도 안 되니까 누가 하간.”(정영모.74)


예전에는 40가구가 훌쩍 넘었던 큰 마을이었다. 당연히 명절 날에는 마을이 떠들썩했다.

“옛날엔 사람들끼리 많이 놀았지. 추석 땐 재미삼아 풍물도 하고. 설날에는 세배한다고 집집마다 돌아댕기다가 술 얻어먹고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지. 그때가 사람 사는 거 같았는데.”(김완태.77)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복 받은 마을’에서 산다고 한다. 자식들도 모두 잘 자랐고, 마을 사람들도 다 잘 살아왔다. 또 유난히 남자가 많은 마을이기도 하다. 몇 가구만 빼고는 다 부부 내외가 함께 산다. 


“이 마을은 별나게 자녀들이 말썽이 없어. 우리끼리 복 받은 마을이라고도 혀. 크게 잘 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빌어먹지도 않고 살거든.”(강춘자_72.여)

 

▲ 장옥석 할아버지가 감 덕장을 놓을 터를 경운기로 닦고 계신다. 

 

‘복 받은 마을’ 만수동. 어여쁘게 고개 숙인 논의 이삭이, 설익은 감나무가, 바닥에 떨어진 여문 밤송이조차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수동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사람을 반겨주는 마을. 그래서 그 옛날 사람을 만 명이나 살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만수동 사람들] 만수동 터주대감 김선봉-오정례 부부
다음글
[우리 완주 살아요] 19가구 중 15가구가 귀농귀촌인 구수마을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