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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100호와 기록 그리고 사람] 2020년 광두소마을2020-12-29

[완두콩 100호와 기록 그리고 사람] 2020년 광두소마을


2020년 광두소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

 

여수 돌산을 출발한 17번 국도는 전남과 전북, 충남과 충북을 거쳐 경기 용인 양지에 닿는다. 416.7km에 이르는 짧지 않은 여정이다. 길은 2차선과 4차선, 6차선이 번갈아 가는데 반가량이 시골풍경을 배경삼아 달리는 2차선 작은 길이다. 때때로 고라니와 함께 가는 길. 그 길이 지나는 한 귀퉁이에 수몰이 예정된 광두소가 있다.




장선댐 수문 공사가 한창인 마을 입구는 우회로 안내판이 먼저 반긴다.


우리가 처음 광두소에 갔던 건 20153월이었다. 꽃가지들은 막 봄바람을 맞아 기지개를 켜고 있었지만 삶의 터전과 고향을 등져야하는 주민들의 마음은 여전히 삭막한 겨울을 살고 있었다.

광두소는 운주면 산북리 천등산 아래에 있다. 이곳에 농업용수 공급 목적의 장선댐이 2005년부터 건설되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댐은 2015년 완공되고 마을주민들은 그 전에 새로운 터전으로 옮겼어야 한다. 하지만 사업은 차일피일 늦어졌고 2018년으로 한 차례 미뤄졌던 이주일정은 다시 2024년쯤으로 멀어졌다.

12월 초 다시 광두소를 찾았다. 5년 전 갔던 길은 막혀있었다. 마을 입구 쪽에선 댐 수문 공사가 한창이다. 고산에서 광두소에 가려면 새로 난 길을 따라 마을을 눈 아래 두고 지나쳐가다 우회해서 진입하는 방법밖에 없다.

 

세월 앞에 기회도 근력도 사라져

댐건설이 결정되었을 때 이 마을에는 36가구가 살고 있었다. 이중 14가구는 새 삶을 찾아 떠났고 22가구는 농어촌공사가 만들어줄 새 보금자리를 10년 넘게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은 야금야금 바닥이 났거나 나고 있는 중이다. 땅이나 집을 갖고 있던 주민들은 성에 안차는 금액일망정 보상이라도 받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세입자가구는 보상금도 없고 이주단지 입주자격도 없어 불안한 하루를 견디고 있다. 주민들은 십 수 년이 지나는 동안 이주해서 먹고살 경제활동의 기회도 근력도 사라져버렸다며 한걱정이었다.


댐 건설 이후 10년 간 마을에 남아있었던 김영복 어르신은 이주단지로 옮겨갈 계획이다.


김영복 어르신(83)은 수확이 끝난 들에서 아궁이 불로 쓸 깻단을 묶어 리어카에 싣고 계셨다. 어르신은 구들과 기름보일러로 겨울을 난다. 깨를 털어낸 대는 불이 되고 볏짚은 사료가 된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이 들이 조만간 물에 잠길 걸 생각하면 어르신은 마음이 뻥 뚫린 것 같다.

이주단지로 가려고. 이 나이에 객지에 나가 고생하느니 고향에 있는 게 낫겠지. 이미 떠난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는데 못 떠나고 기다린 사람들은 10년 동안 다 까먹었어.”

이주예정지는 마을을 기준으로 좌우 3군데에 나뉘어있다. 어르신이 이주예정지라고 가리킨 곳에는 흙과 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논이며 밭이 들어설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은 설혹 땅이 있다 해도 나이가 들어 농사를 짓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몇 해전만해도 함께 들에 나왔을 아내 손기순(80) 어르신은 이미 건강을 해쳐 집에 계셨다. 손 어르신은 운주 산북 출신으로 24살에 광두소로 시집을 왔다. 2016년 마을을 기록한 책자 광두소 마을이야기속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외모가 마음에 들어 시집왔다는 속마음을 살짝 내비쳤었는데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깊이 내려앉았다.



대전을 오가며 배추농사를 짓는 최랑규, 한귀례 부부


배추밭에서 만난 최랑규(78), 한귀례(75) 어르신은 대전에서 오가며 농사를 짓고 계시다. 최 어르신은 이곳이 고향이고 한 어르신은 논산 양촌에서 시집왔다. 부부는 댐 건설 추진 전에 이주했지만 땅을 내놓은 건 그 후였다. 농업용수가 필요하다는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놓았다고 했다. “고향이 사라진다니 천지개벽 되는 거지. 그전에 대청댐 수몰민들에게 천지개벽돼 나온 사람들이네 하고 우스갯소리 했는데 지금 내가 그 처지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두 분은 올해 이곳에서 1800여 평의 농사를 지었는데 홍수로 피해가 컸다. 그래도 농어촌공사의 땅이어서 보상받기는 힘들다. 한 어르신은 억울하니 죽자 살자 농사만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마저도 언제 못하게 할 지 알 수 없다. 이미 농사짓지 말라는 현수막을 내건 건 오래전 일이다.

   

그래도 봄이 오고 꽃이 피고

광두소 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는데 바로 제자리 색시.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그럴듯한 말이라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을에 태어나 그 마을 총각과 결혼한 사람을 제자리 색시라 불렀는데 유난히 광두소에는 제자리 색시가 많았다. 그만큼 산이 높고 골이 깊었다는 방증이다. 최복순(86) 어르신도 마을총각 강경원(86) 어르신과 결혼한 제자리 색시다. 집을 찾았을 때 최 어르신은 몸에 탈이 나 쉬고 계셨다. 덕장에서는 곶감이 바람을 맞고 있었다. 두 분이 함께 따서 깎아 말리고 있는 감이다. 어르신들은 늙은이들을 잊지 않고 찾아와줘 고맙다5년 전 그날처럼 감을 내오셨다. “단감이 이렇게 짤어. 맛은 좋은데.”



제자리 색시인 최복순 어르신과 강경원 어르신이 대문을 나서고 있다.


두 분은 전주 외곽에 집 한 채 장만해놓으셨는데 고향에 남을지 떠날지 아직까지 결정을 못했다. 계속되는 일정지연에 언제 이주할지 알 수 없는 일이라 구체적인 계획도 못 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집 돌담이 예뻐 그곳에서 사진을 찍기로 하고 나오니 문밖에 매실나무가 보였다. 5년 전 그 나무아래에서 할머니가 민들레를 캐고 계셨다

김광준 이장의 고향도 이곳이다. 그는 지지부진한 이주계획에 못내 답답해하고 있었다. “내년 봄부터 이주단지를 건립한다는데 하도 미뤄 와서 믿들 못해요. 지켜보는 거죠. 싸게 줘야 할텐데.” 이장님 말씀에 의하면 5년 사이 돌아가신 분도 있고 떠난 분도 있었다. 한란수(78) 어르신도 몸이 안 좋아지셔서 대전에 가 계신다고 했다. 우리는 그분이 보물처럼 아끼던 100년 된 친정엄마의 약 간장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15년 완두콩 4월호에 광두소의 삶은 계속된다고 썼다. 202012월에 만난 광두소의 삶도 계속되고 있다. 버스가 끊겼지만 마을주민이 개인차로 이웃들을 실어 나르고 밭에는 배추가, 처마 밑엔 곶감이 작년처럼 익어가고 있다. 해마다 자식들이 몰려와 김장을 해가고 60여 년 전 논 두 마지기를 기부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마을제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삶이란 물줄기는 댐으로 가둘 수 없는 것이어서 땅이 물속에 가라앉는다 해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덜 흔들리고 덜 고단하기를 바라지만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 광두소의 새 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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