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품앗이칼럼 · 2026.10.19

이종민의 다스림의 음악

날개를 접었던 자리

(34)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6.10.19 17:08 조회 4 댓글 0
목록으로 돌아가기

가을이 오면 빈자리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나뭇잎은 아직 가지에 많이 남아 있는데 마음은 벌써 무언가를 자꾸 내려놓습니다. 오랫동안 산책을 함께했던 봄이를 보내고, 집에서 모시던 어머님마저 결국 요양원으로 모셨습니다. 같은 집, 같은 마당인데 하루의 기척이 달라졌습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익숙한 존재를 찾다가 멈추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봄이는 열세 해 동안 유연당의 아침을 함께 열어주었습니다. 산책은 운동이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없이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이제 그 길을 걸으면 발걸음 옆에 빈자리가 따라옵니다. 길은 여전히 이어져 있는데 함께 걷던 생명은 없습니다. 오래 나눈 시간이 몸에 남아 있어서 마음보다 몸이 먼저 동무를 찾는 듯합니다. 어머님의 빈자리는 또 다르게 아픕니다.

찾아뵐 수 있고 손을 잡을 수도 있지만 한집에서 아침과 저녁을 나누던 생활은 끝났습니다. 돌봄을 위해 내린 결정임을 알면서도 더 모실 수는 없었을까 하는 물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머리로 헤아린 사정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속도가 이렇게 다릅니다.

어머님이 계시던 자리를 바라보며 모신다는 일이 얼마나 많은 작은 기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새삼 알게 됩니다. 이런 가을에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듣습니다. 연인과의 이별을 노래한 곡이지만 오래 귀 기울이다 보면 사랑했던 존재가 남긴 빈자리들이 그 안으로 들어옵니다.

노래는 누구를 잃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다만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마음을 천천히 펼쳐 보여줍니다. 제목부터 깊게 다가옵니다. 사랑은 떠나면서 가을을 남깁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빛과 바람이 빈자리가 생긴 뒤에는 오래 마음에 걸립니다.

마당에 드는 햇살도 산책길의 풀잎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자꾸 서늘합니다. 계절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길을 이별이 먼저 열어놓은 것 같습니다. 노래 속에서는 아직 겨울까지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말이 아픕니다. 이별은 늘 조금 더 뒤의 일이기를 바랐으니까요.

봄이와 한 계절쯤 더 걸을 수 있을 줄 알았고 어머님도 조금 더 오래 집에서 모실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충분히 사랑한 뒤에 아쉬움 없이 보낸다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함께한 세월이 길어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더 해드리지 못한 일, 한 번 더 쓰다듬어주지 못한 순간입니다.

그럴 때 노래의 철새가 마음에 내려앉습니다.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먼 길을 날아온 생명이 날개를 접으려면 그곳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곁에서 편히 쉬던 봄이를 떠올립니다. 어머님께도 이 집이 오랫동안 그런 자리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들의 곁에서 쉬었던 쪽은 저였습니다.

바깥일에 지쳐 돌아와도 기다리는 생명이 있고 안부를 살펴야 할 어머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삶의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돌보는 동안에는 돌봄의 무게를 느꼈습니다. 빈자리가 생기고 나니 그 무게가 하루를 지탱해주기도 했음을 깨닫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일어나고, 밥을 챙기고, 걸음을 늦추는 일 속에 생활의 온기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일을 하던 시간들이 비어 있습니다.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 서둘러 정하기보다, 당분간은 허전한 채로 두어도 좋겠습니다. 오래 함께한 존재에게 마음이 적응할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겠지요.

패티김의 깊고 긴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꽉 막혀 있던 숨이 조금씩 풀립니다. 잊으라는 말도 기운을 내라는 재촉도 없이 노래는 그리움이 충분히 울릴 자리를 마련해줍니다. 눈물이 나면 잠시 그대로 듣습니다. 슬픔에도 자기 몫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한 소절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사이에 배우게 됩니다.

봄이와 걷던 길은 앞으로도 걷겠지요? 어머님을 찾아가 손을 잡고 집과 마당의 안부를 전해드릴 것이고요. 함께하는 방식이 달라진 만큼 사랑도 새로운 길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노래 끝에서 멀리 있는 봄을 향해 꽃을 꿈꾸듯, 아직은 서툴고 허전한 마음으로 다음 날을 맞습니다.

가을 햇살이 어머님의 새 거처에도 따뜻하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