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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 두 달 21] 여름을 지나는 술, 과하주(過夏酒)2023-09-25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 두 달 21] 여름을 지나는 술, 과하주(過夏酒)

여름을 지나는 술, 과하주(過夏酒)


아침 매미 소리가 상쾌해지고, 나무 그늘이 깊어졌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도 저녁 바람에 식혀지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도 이제 끝자락이다. 아침나절부터 쪄대는 더위를 피해 어스름 새벽과 저녁 시간을 틈타 게릴라처럼 농사를 지어야 했던 노모는 해마다 마주하는 여름이 처음인 듯 힘겹다고 했다. 여름은 술 빚기도 힘든 계절이다. 잡균이 많아진 습한 날씨에 술을 안전하게 발효시키기도, 최소 한 달 이상 술독을 23도 이하로 낮춰 숙성시키기도 어려운 문제이다. 마땅한 저장 기술이나 시설이 없던 옛 조상들은 어떻게 술을 빚고 보관했을까. 초봄에 빚어놓은 좋은 술도 금세 시어져 식초가 되어버릴 텐데 말이다.

 

과하주라는 이름을 가진 술이 있다. 여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으나 술이 여름을 지난다니 소리 내어 부를 때마다 시적인 느낌이 든다. 음식디미방(1670)]이라는 조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과하주는 술을 빚어 발효가 진행 중인 술독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를 부어 빚는 기법의 술이다. 청주, 탁주, 막걸리와 같은 발효주는 낮은 알코올 도수에서 더운 여름에 변질되기 쉽다


찹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어 술이 끓어오르는 3~4일째에 증류주인 소주를 술독에 붓는다. 술덧(술독에 발효 중인 고두밥, 누룩, 물의 혼합물)에 높은 알코올 도수의 소주가 퍼지면 효모가 죽거나 생육하기 힘든 환경에서 발효가 중지된다. 술덧 속에는 효모가 마저 먹지 못한 당분이 남아 술맛은 달고, 도수 높은 소주로 인해 과하주는 발효주이면서도 알코올 도수는 20도 이상을 유지해 여름철에도 마실 수 있게 된다.


과하주는 효모라는 자연의 미생물이 만들어낸 발효주와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낸 증류주가 만나 탄생한 혼양주(混釀酒) 기법의 술이다. 양조 역사에서 유레카를 외쳐도 될 법한 이 신묘한 기법이 1670년 기록에 등장했으니 실제 민가에서는 1600년대 초에도 이미 사용되던 양조법이라 추측된다


17세기 말 영국은 프랑스와의 와인 무역이 금지되자 새로운 와인 무역지로 포르투칼을 찾아냈다. 대서양을 오가는 긴 항해 중에 와인의 변질을 막기 위해 브랜디(와인을 증류한 술)를 일부 첨가하면서 포트와인(Port Wine)’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주정강화 와인이 유래되었다 하니 과하주 제조법은 서양보다 백 년을 앞선 양조기술인 셈이다.

 

술을 빚는 이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술이 무엇이었는지 묻곤 하는데, 대개 과하주를 으뜸으로 꼽는다. 잘 빚어진 과하주를 맛보았을 때 우리 술이 이렇게 기품있고 고급스러울 수 있는지 충격적이었다는 이도 있었다. 소주가 발효 중인 곡주 속에 스며들어 독한 맛은 부드러워지고 과일이나 꽃 향은 배가된다. 당이 많이 남아 달기만 한 술은 무겁고 끈적거리는 뒷맛을 남기지만 잘 빚어낸 과하주는 상큼한 단맛과 꽃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부드러워진 소주가 뒷맛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발효주를 잘 빚어야 하고, 소주를 다루는 기술, 즉 증류기술도 갖춰야 하기에 가양주인에게 좋은 과하주를 빚는다는 것은 최고 수준의 술 빚는 경지에 올랐음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아름다운 술맛을 지닌 과하주는 조상들이 물려준 귀중한 문화자원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조건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여름이라는 힘겨운 계절이 선사한 선물이기도 하다


덥고 습한 여름이 있었기에 누군가는 익어가는 술독에 독한 소주를 부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여름을 나는 술을 얻지 않았겠는가. 과하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이 갈수록 혹독해지는 여름을 견뎌낼 힘을 어디선가 찾아내길 기원해 본다.


/유송이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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