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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9] 술 짜는 날 2022-09-22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9] 술 짜는 날

술 짜는 날


술 빚는다고 고두밥 찌는 날엔 덕지덕지 손때 절은 아이들이 신났고, 술 짜는 날엔 몰래 먹는 술맛을 알아버린 동네 더벅머리 총각들이 신났다. 추석 전날이면 타지에 사는 사촌들까지 돌아와 동네는 한껏 들썩이고, 누구네 집 술 짜는 날만 기다려 어른들 몰래 훔쳐 온 막걸리 한 바가지에 밤새는 줄 모르고 놀았다. 들썩대는 기분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여서 기름진 고기산적에 뻘건 동태찌개가 상에 올라오면 탁주 사발이 오가며 호탕한 둘째 작은아버지의 농담에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담을 넘었다. 괄괄한 넷째 작은아버지가 알 길 없는 부아를 못 이기고 토방을 뛰쳐나와 씩씩거리며 집을 나가버려도 이내 서울 고모할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그 아들이 또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와 다시 웃음꽃이 피어나고, 아이들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다.


술을 짤 때마다 나는 어릴 적 북적대던 명절 전날 풍경이 떠오른다. 부침개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차고, 갓 태어난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종일 부뚜막에 땐 불로 더운 방에서 사촌들이 뒤엉켜 자고, 몇 달 차이로 아이를 낳은 엄마와 숙모가 젖을 물리며 나누는 얘기를 듣다 가뭇가뭇 잠이 들면 어느새 여름은 가고 서늘한 가을밤이 내려앉았다. 어린 눈에도 궁색한 세간이었지만 고향 집은 아버지의 여섯 형제와 딸린 식구들이 들어차도 다 품어주었다. 그 많은 입을 채울 음식이 만들어지고,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이 찾아와도 허물없이 반가웠던 그런 날들이 다시 올까.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품이 좁고 후덕하지 못한 탓이 아니고 세상이 변했다고 핑계를 대본다. 죽기 살기로 경쟁에 내몰려 보니 내 품 안의 것이 아니면 형제도 이웃도 살피기 버거운 세상이 되어있더라고 말이다. 씁쓸한 생각에 닿고 보니 어느새 뽀얀 탁주가 대야에 넘실넘실 차 있다.


한 달간 숙성을 거친 술덧 위로 맑은 청주가 고이면 술 짜기를 결정해야 한다. 술 짜는 날은 지난 한 달 애를 태우며 기다린 술을 만나게 되니 여간 설레는 날이 아닐 수 없다. 그럴수록 술 짜는 날 역시 빚는 날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고대하는 술을 만나길 소원하는 만큼 가장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 애쓴다. 날씨가 흐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 바쁘거나 피곤한 날은 피하곤 한다. 대야 위에 쳇다리를 걸치고 체를 올린다. 체에 자루를 올려놓고 술독을 쏟아붓는다. 술덧이 툼벙툼벙 술자루에 담기면 쳇다리 밑으로 뽀얀 탁주가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한다. 술자루를 오므려 눌러가며 한 덩어리의 술지게미가 남을 때까지 술을 짜낸다. , , 누룩 외에는 어떤 첨가물도 없이 발효시켜낸 원주(原酒)이다. 쌀이 농축된 구수한 향과 달고 새곰한 과일 향을 옹골지게 품은 탁주가 주룩주룩 떨어지는 소리는 그야말로 황홀경이다.


술을 걸러 대야에 가득 채우면 풍요롭던 어린 시절 명절 전날을 떠올리다 이내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나의 다정한 이웃들을 떠올리게 된다. 일상의 소소한 편린들을 살뜰히 챙겨주며 안부를 물어주던 사람들! 나 또한 술을 짜며 벅차오르는 이 풍요를 기꺼이 나누고 싶은 사람들! 추석을 앞두고 정성껏 빚은 이 술로 당신들과 함께 살아가는 감사를 전할 수 있길 고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막 거른 술 한 모금을 마셔본다.

........ 명절 전날의 소란스러움과 같은 생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 유송이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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