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의 완주이야기 68] 삼례읍 구와리 언제나 유명202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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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읍 구와리 언제나 유명
삼례읍 구와리는 ➀씨족 ➁부자 ➂지식인으로 유명하다. 예전 구와리의 씨족 비율이 전주이씨:전주류씨가 반반이었는데 사람은 ‘이씨’, 재산은 ‘류씨’가 낫다고 했다. 류배옥 씨가 아들 류원옥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입학시키고 다달이 쌀 120섬을 보냈다는데 유학생 아들 류철수 씨의 증언이란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다. “일정시대 배워 아는 것이 많을수록 우리나라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야하고 독립하여 다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한다.” 이 주장 동포 귀에는 쏙쏙 들어오나, 일본인들 입장에선 못마땅해 잡아다 가두고 벌을 주었다. 해방정국-미국군정-세울 나라 기본 문제를 놓고 의견이 많을 때 진보적인 지식인이 이 지역에 많아 ‘○○코바’ 소리를 들었으나 70여 년 전 이야기이다. 현대사 연구 자료 이우성 선생 재판 기록이 이런 일을 뒷받침해 준다.
- 구와리의 푸르른 들판이다.
류병양(柳秉養:1864∼1940) 선생은 독보적인 한학자로『우루재창화편(愚陋齋唱和編:상·하)』과『우루재원고(愚陋齋原稿)』를 보면 완주의 진짜 학자, 선비임이 확실하다. ‘우루(愚陋)’는 류병양 선생 자호로 ‘어리석고 누추하다’의 뜻이나 사람마다 ‘아니다’ ‘아니다’ 절대 아니야’ 이런 글로만 묶어진 책이『우루재창화편』상·권이다. 우루재 선생 마을이 ‘유리(柳里)’로 한 바퀴 둘러보면 묻지 않고도 깨달음이 많다. 담장 돌은 앞내에서 건져 올린(주은) 돌이다. 전국 축구대회를 연 자리가 있으며 너른 들의 벼농사와 지금은 딸기 재배로 유명하다. 우루재 선생은 젊은 선비들을 만경강 둔치에 모아 전국 백일장을 여셨는데 구경꾼을 포함 1만5천명이었다고 한다. 류 선생의 시 만흥(晩興) “날마다 흐르는 푸른 물길 천리인데(碧澗日千里:벽간일천리)/ 늙은 회나무 봄을 맞기 100년이구나(老槐春百年:노괴춘백년)/ 때때로 대하는 조화로운 사물마다(對時觀物化:대시관물화)/ 하나는 기쁨 그 한편은 서글픔이로구나(一喜一悽然:일희일처연)” 글 가운데 ‘노괴(老槐:늙은 괴목)’를 찾아가니 심히 처연하다. 몸통 90%는 썩어 가죽(깝질)만 남았고 장정이 발길로 힘차게 차면 넘어질 지경이랄까 간신간신한데 관계자나 당국 모두가 손을 놓고 있다. 전주시 삼천동 장씨네 소나무처럼 보호만하면 능히 살릴 터인데 너무나도 아쉽다. 그 곁의 냉동 창고 이름 ‘창화재(唱和齋)’라 하면 빛이 더 나고, 대성할 상호이다. 와리의 양봉인(養蜂人) 다수는 6·25 전쟁 이후 벌통을 친구삼아 팔도강산을 유랑하다 전문인이 되었다고 한다. 딸기밭 근처 정려각이나 큰 나무마다 양반 냄새가 풍풍 난다. 류일수∙류정훈∙류해광 제씨가 이 시대 전주류씨의 큰 기둥이다. 신지식인들은 뿌리 깊은 이런 마을에서 <완주 정신>을 꼭 찾아내기 바란다.
-유리(柳里)의 딸기 밭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