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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 완주이야기 29] 구만리와 회안대군(懷安大君)2016-10-31

[이승철의 완주이야기 29] 구만리와 회안대군(懷安大君)

구만리와 회안대군(懷安大君)

 

우리 국민은 흥도 있지만 한 많은 민족이다. 노인마다 내 얘기 책으로 엮으면 한 권 되고도 남지.’ 고생을 하도 해 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봉동읍 구만리는 완주에서 가장 한 많은 마을이다.

조선 초 회안대군(13641420) 이 태조(13351408) 4남임을 다 안다. 아우 정안대군(13671422:태종)에 밀려 귀양생활을 오래 한 사실도 잘 아는 얘기다. 여기 구만리 천내(川內)가 바로 회안대군 만년의 삶터였으며, 최양(13511424)도 별세한 마을이다. 고려 말 조선 초를 들썩하게 한 영웅(?) 두 분이 4년 사이에 가셨다.

 

회안대군의 20년 귀양살이 토산-안산-익주(익산)-순천-익주-전주 등등 여러 곳에서 어렵게 지냈다. 함경도에서 낳아 충청도 은진에서 죽어 전주 법사산(금상리)에 묻혔는데 생시 천렵도 어려웠고 나들이와 사람 만남이 힘들었다. 감농(監農)을 했다하니 한정된 민초들이 대화 상대일 뿐이었다. 태조 돌아가셨어도 죄인(?)이라는 멍에 때문에 가지 못했고 민씨 처음 부인 젊어서 작고하자 박씨와 혼인하니 시비가 따랐으며, 또 황씨 금씨와 혼인했으니 처복마저 없었지만 인정 넘치는 흔적이 있다.

 

봉동 생강을 아우 태종에게 보냈고, 이에 앞서 차부원(두문동 72)이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만 놀라 타고 갔던 말 대신 소를 타고 와 호가 망우당(忘牛堂)이란다. 최양은 이 태조와 가까운 사이 전주 땅 800(:222천평/732,600)을 준다 해도 거절했다. 정몽주가 외삼촌인데 이를 받았다면 그 꼴이 무엇이겠나. 아마 후손 전주최씨는 고개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그의 묘는 소양면 대승리에 있다.

 

이리하여 완주 전주는 의리의 고장이다. 이를 입증하는 이름이 많다. ‘마그내(막은내)’를 한자로 막근천(莫近川)”이라 쓸 수도 있다. 이 말은 가까이 하지마라의 뜻이다. 막았다는 말이다. 회안대군의 활동을 제한 한 내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마을 사람들은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에 이를 회안대군의 한을 알았고, ‘구만리 장천에 가 임금 되라 빌었을 것이다. 이래서 이름이 구만리(九萬里)라더냐?

 

완주군 신청사에서 800m 안팎 바로 이웃이다. 완주군청은 이런 한을 풀어 주려고 가까이 이사 왔다고 말하면 전주최씨 전주이씨 고마워 감읍할 것이다. 두 성씨는 조선 초기의 왕조실록을 읽지 말아야 한다. 알아 좋은 것도 있지만 몰라야 약되는 게 더 많다. 원한은 잊어버려야 한다. 원래 지명은 궁만리(弓灣里)’라 했다니 움푹한 지형임을 알 수 있다. 옴폭한 데는 숨기도 좋지만 가둬 놓기도 편리하다. 내안[川內] 움푹한 곳 구만리를 기억하라. 봉강서원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다.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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