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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 두 달 20] 방앗간에서2023-08-29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 두 달 20] 방앗간에서

방앗간에서


백세(百洗, 쌀씻기)를 마친 쌀은 여덟 시간 정도 찬물에서 불린다. 물을 충분히 머금은 쌀이라야 고두밥을 찌든 죽을 끓이든 잘 익기 때문이다. 불리기가 끝나면 쌀에 손을 대지 않고 샤워꼭지 물길로만 잔류해 있던 쌀뜨물과 나머지 싸라기를 헹군다. 쌀알이 조금만 힘을 가해도 깨지는 매우 약해진 상태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헹구기를 마치면 쌀을 체에 밭쳐 물기를 빼고 쌀가루를 빻으러 방앗간에 간다. 쌀가루를 빻아 소분해 냉동실에 보관해두면 언제든 죽이나 범벅, 설기떡 등의 방법으로 밑술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후 5시를 지나 들른 방앗간 안이 어둡다. 기척은 있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다. 안쪽으로 들어가 봤더니 공간이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더 안쪽에 있는 공간에서 사장님이 분쇄기에 마늘을 가느라 소리를 못 들으신 모양이다. 들어왔던 문 쪽으로 다시 가서 기다렸다.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문 앞쪽의 가장 넓은 공간에는 고추나 통밀 등을 빻는 큰 기계들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두 번째 방엔 쌀 같은 가벼운 것들을 빻는 기계가 있고, 더 안쪽엔 물기 있는 것들을 가는 커다란 분쇄기와 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방앗간은 기계마다 먼지와 가루가 묻어있고, 집기와 물건들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알면서도 왔지만, 집 앞에 가까운 방앗간이니 조용히 입 다물 수밖에 없다. 사장님은 기계 위에 겹겹이 포개 놓은 빨간 고무다라이 하나를 꺼냈다. 다라이 안에 묻어있던 정체 모를 반죽 찌꺼기를 성급히 훑어낸다.


어저께 쌀가루 빵군다고 써서 그려. 암시랑 안혀.”

민망한지 내 눈치를 살짝 보셨지만 크게 신경 쓰시지는 않는 것 같았다. 롤러도 언제 쓰고 다시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쌀이 들어가면 그 안에 찌꺼기를 그대로 닦아서 나올 것 같다. 백세가 다 무슨 소용인가. 오백 번을 휘저어 깨끗하게 씻은 쌀인데 사장님은 마늘을 빻던 고무장갑을 낀 채 쌀가루를 무심히 쓸어 담았다. 만원을 드리니 칠천 원을 거슬러 주셨다.


우리 집 아자씨나 나나 옛날에는 막걸리 한 병씩은 너끈 마셨는디 시방은 늙어서 약봉다리만 끼고 살어. 술은 입에 대도 못혀.”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먹던 시절엔 방앗간도 화려한 시절이었으리라. 고추를 빻고, 기름을 짜고, 도토리를 갈고, 일 년 내 제사, 명절, 결혼식, 회갑잔치, 돌잔치, 장례식, 고사 등 떡을 맞추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랬던 시절 이 방앗간에도 갈무리한 것들을 이고 지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저 문턱을 넘으며 말을 걸어왔을까. 문턱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 먼지 낄 날이 없었을 것이고, 그때는 젊었던 사장님도 생기가 넘쳤을 것이다. 그녀의 일이 많은 이들에게 늘 필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점점 쇠락을 거쳤을 먼지 낀 방앗간 기계들과 사장님의 일이 애잔해져 왔다. 외식, 배달, 포장에서 꺼내 끓이기만 하면 되는 밀키트의 시대로 식생활이 급변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곡식을 거두어 말리고, 빻고, 기름을 짜던 인간의 오래된 일은 세분화된 산업사회에서 수많은 가공품으로 대체되고 있다. 우리 동네 둔산방앗간은 끝내 문을 닫고 청과물 가게가 들어섰다. 요즘엔 좀 더 먼 곳에 있는 은하방앗간을 간다. 젊은 사장님이 일에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이다. 모두가 예전의 방식대로 살 수는 없으나, 익명의 손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먹거리를 장만하려는 이들을 위해 묵묵히 기계를 돌리고 있는 방앗간이 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유송이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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