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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 소농리 원소농마을] 휘돌아 마을 한바퀴2022-04-20

[비봉 소농리 원소농마을] 휘돌아 마을 한바퀴

마을 냇물따라 사람과 시간이 모여 흐르네

봄의 중심이자 절정에 다다랐다. 나무들이 피워낸 어린잎과 산과 들에서 솟아난 꽃들의 발랄한 색으로 온 마을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거리에는 옷차림만큼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람들이 골목을 거닌다. 비봉면소재지와 맞닿은 원소농마을에도 사람들이 제법 바깥에 나왔다. 소일거리를 하고 옛 빨래터에 앉아 봄나물을 헹구며 각자의 일과를 보냈다.

 

냇길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삶  

따스한 계절이 빚어낸 사랑스러운 풍경을 구경하다 보면 동네 한 바퀴가 금방이다. 마을 중앙으로 뒷산에서 흘러 내려온 시원한 물이 흐른다. 과거 빨래터이기도 했던 이 냇가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모여든다. 원소농마을에 찾은 날마다 소쿠리를 옆에 낀 아낙들이 부지런히 냇가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부터 주민들은 이곳에 모여 이른 아침에는 먹을 것을 씻어가고, 한낮에는 빨랫감을 가져오거나 설거지했다.






장점순(74) 어르신은 막 캐온 쑥과 돔나물을 물에 헹구고 있었다. 점순 어르신은 쑥은 된장 넣고 국 끓여 먹으면 맛나고 돔나물은 장 넣고 비벼 먹거나 말간 국물에 넣으면 된다지금은 집에 수돗물이 잘 나오니까 편하지만 그때는 집집마다 물이 귀했다. 그때부터 빨래터에 들고나온 게 몸에 배서 지금도 나온다고 말했다.


빨래터에서 갓 따온 봄나물을 헹구는 점순 어르신.


1972년도에 익산에서 이곳으로 시집 온 심철례(77) 어르신도 빨래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엔 식수가 없어서 냇가에서 물을 길어다 마시기도 했다. 철례 어르신은 누가 김장하는 날이면 그 집이 물을 쓰도록 위에서 빨래도 안 했다. 시집오고 나서 2~3년 뒤엔가 수도랑 전기가 들어와서 그 풍경도 서서히 사라졌다고 말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 마을 초입 부근에는 비닐하우스와 아담한 논이 모여 있다. 그 건너에는 조옥선(79) 어르신 댁이 있다. 어르신은 집보다는 바깥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다. 어느 날은 빨래터에서 쪽파를 씻고 또 다른 날엔 수레에 채소를 가득 싣고 골목을 걷고 있었다.


옥선 어르신은 아침에 영감하고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을 받아왔는데 이걸 소 막사에 뿌리면 냄새가 덜 난다고 그랬다. 나간 김에 무순, 당근을 좀 사 왔는데 이걸로 쪽파로 김치 좀 담그려고 한다며 웃었다. 그는 일주일에 세 번씩 노인 공공근로를 다니는 등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어르신은 옛날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자들은 따로 있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힘들었는데 요즘에는 그래도 부지런하게 노력하면 먹고 살 수는 있다. 게으르지만 않으면 굶주리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세 번은 노인공공근로를 하는 조옥선 어르신은 늘 바지런해 집보다는 바깥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다.


척박한 땅에 피어난 귀한 인물들 

예부터 마을에 경작할 땅이 적어 주민들이 대부분 소농이고 먹을 것이 부족했다. ‘자원이 없는 곳에선 사람이 보석이라는 말이 있듯 원소농마을엔 유독 이름난 인물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 류준상(1911~1950) 제헌 국회의원과 류한상 상무부 공업국장이 있다. 두 인물은 인민공화국 시절이 도래하면서 참혹하게 희생됐다.


이들의 후손인 유희남(71) 어르신은 그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희남 어르신은 “6.25때 비봉에 있는 지역 고위층들은 거의 피살당하셨다. 큰아버지이신 류준상 초대 국회의원께서는 목화밭에 숨어있다가 어떤 사람이 신고해 붙잡혀서 돌아가셨고 우리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진 않았지만 형제를 두 명이나 잃어서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하셨다고 말했다.


희남 어르신이 경운기에 비료 포대를 싣고 있다.


마을에 남성 중 최고령인 유민상(84) 어르신도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해내며 덤덤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르신은 전쟁 전에만 해도 우리 마을에 국회의원, 면장, 도의원 같은 벼슬 지낸 사람들이 많았다. 근데 그분들이 다 인민군들한테 희생당하면서 쑥대밭이 되었다고 말했다. 과거 마을에서 고위직을 맡은 인인물로 고흥유씨가 대부분이다.


이밖에 원소농마을이 유명세를 떨친 데는 농악회를 통해서였다. 초등학교에서도 마을잔치에서도 항상 농악이 펼쳐졌고 주민들에게 농악은 곧 일상이었다.


이경배(74) 어르신은 고인이신 이귀환이 우리 아버지인데 상모 돌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이었다. 열두 발이나 되는 상모를 돌리는 사람은 아버지가 유일했다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 꽹과리도 잘 치고 상모도 잘 돌리셔서 옛날엔 뭘 하든 참 재밌었다고 회상했다.



경로회관 맞은편에 자리한 '농기구써비스수리쎈타'. 마을 공용 건물은 아니며 개인이 임대료를 내고 사용 중이다.


[박스]

원소농마을은

마을 명칭은 본래 소롱(작을 소 대그릇 롱)으로 썼고 대롱(클 대 대그릇 롱)과 대비된 이름이다. 또는 윗동산의 형태가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도 전해진다. 현재 30가구, 9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과거 고흥유씨, 담양국씨 집성촌으로도 알려진 마을이다. 옛날엔 마을 부지가 바다였다는 전설도 전해지는데 앞산 중턱에 올라가 보면 토기, 옹기의 파편이 남아있어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되며 마을 부지 땅을 깊게 파보면 뻘(개흙)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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