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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봉동 무관마을] 김정자 어르신2022-03-17

[봄이 오는 봉동 무관마을] 김정자 어르신

척박한 시절 보내온 세월 어머니가 견딘 무게


“편찮은 남편 대신 온갖 일 다 했지”

무더위 쉼터 건너 대문 앞에 의자가 셋 놓인 집이 김정자(73) 어르신 댁이다. 어르신은 분홍 티셔츠를 입고 계셨다. “우리 아들이 익산서 K2매장 사장인데 나 입으라고 하나 준 거야.” 막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르신은 늦은 끼니를 챙겼다. 전날 푹 쪄놓았던 고구마를 집에 찾아온 객들에게 건네고 나서야 밥 한술을 겨우 뜨기 시작했다.

 

정자 어르신의 어린 시절은 척박하고 고단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그 뒤로 할머니와 같이 지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엔 김제 죽산면에서 다른 집에 얹혀 지냈다. 어르신에겐 맘 붙이고 지낸 곳도 고향도 없었다. 그러다 열아홉 살 때쯤 죽산면에 사는 어느 각시가 중매를 서줘서 이곳 무관마을로 시집왔다.


그때 너무 가난해가지고 (결혼)식도 못 올렸어. 남편이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결혼했을 당시에도 몸이 편찮으셨어. 땅이 없으니까 농사는 못 짓고 남편이 대나무 잘라놓으면 소꾸대미(바구니) 만들어서 팔고 나물 해다 머리에 이고 사방팔방 돌아다녔지.”


당시 어르신은 가장이자 엄마고 아내였다. 아들 셋, 딸 하나 네 남매를 키워내는 무게를 버텨내야만 했다. 그는 돈이 되는 일거리를 스스로 찾아 나섰다. 주변에 있는 쑥, 쇠무릎 약 뿌리를 캐서 팔고 아카시아 잎을 말리거나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머리 위에 얹은 수건이 가운데만 닳을 정도로 일을 했다.



젊을 때니까 그렇게 일했지. 그렇게 맨날 뭐 해 가지고 팔러 나가서는 돈이 안 되니까 횟가루(산화칼슘) 만드는 공장에서도 6년 정도 일했어. 근데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리뼈가 부러져가지고 그만뒀어. 그래도 그때 국민연금 들어놔서 지금 큰 도움되고 있어.”


어르신의 집 안 거실 바닥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자식, 손주들 사진액자로 가득하다. 한편에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순서대로 졸업사진이 걸려있다. 그 옆으로는 2007년 봉동읍민의날을 맞이해 받은 장한 어머니상도 있었다. 이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녀를 헌신적으로 잘 키운 어머니에게 주는 표창장이다.


거실 한면을 채운 자녀들의 대학 졸업사진


없는 집에서 애들이 잘 커 줘서 참 고마워. 큰딸이 결혼 전에 신탁은행 다녔는데 그때 여기로 집을 새로 지어줬어. 졸업하고 바로 돈 벌어가지고 챙겨주더라고. 옛말로 아들이 최고라지만 아들은 집안에서 가장 노릇하느라 힘들고 오히려 딸이 더 챙기는 것 같아.”


정자 어르신에게 자식이란 자랑스럽고 든든한 버팀목이면서도 아직 챙겨줄 게 많은 존재다. 그래서일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뭐 하나라도 자식들 입에 넣어주는 게 어르신의 행복이다.


오늘 아침엔 하지감자 심었고 인제 콩 좀 심어놓으려고. 많이 나오면 한두 박스나 팔고 나머지는 자식들 줘야지.”




밭고랑 사이에 잘키워 자녀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콩을 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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