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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별곡]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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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이라도 챙겨가라


토요일 오전 11시에 집회가 열렸다. 비봉 돼지농장 앞 도로변에서 열렸다. 이름 하여 ‘행정소송 1심 승소! 비봉 돼지농장 부지매각 촉구 완주군민 결의대회’. 바쁜 추수철이다. 나락 수확은 얼마 전 끝났다지만 콩이며 들깨며 생강이며 거둬들여야 할 것들이 줄 서 있고, 말려놓은 고추를 갈무리 하고, 김장 준비도 해야 하는 눈코 뜰 새가 없는 철이다. 그래도 마을 어르신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집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설령 농사를 짓지 않아 거둬들일 게 없는 이들에게도 토요일 오전은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도 어린 아이들 손 붙잡고 하나 둘 모여드는 것이다. 다른 일이 잡혀 어렵겠다던 비봉면 사물놀이패가 뜻밖에도 집회 30분 전에 길놀이를 해주겠노라 연락이 왔고, 어느새 울긋불긋한 농악복을 차려 입은 열 명 남짓 풍물패가 삼채 가락을 신명나게 두드리는 게 아닌가. 집회장 분위기도 덩달아 뜨겁게 달궈지는 거다. 그렇게 시작된 집회는 한 시간 남짓 ‘짧고 굵게’ 끝났다. “농장부지 팔 때 우릴 불러줘~ 언제라도 달려갈게~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언제라도 사러갈게~” 인기가요 <무조건> 노랫말을 바꿔 떼창으로 몇 번씩 불러 재끼며 다들 신나는 표정이다. 어디서는 생강차를 준비하고, 또 어디는 우유를 나눠주고,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에서는 가래떡을 뽑아 모두에게 돌렸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갈 길이 멀지만 사람들은 이렇듯 모처럼의 승리를 맘껏 누리는 것이다. 쉽지만은 않으리라 예상했고 그런 만큼 걱정이 컸지만 1심 재판부는 결국 완주군과 주민들 손을 들어주었다. 완주군의 돼지사육업 불허가 처분이 적법하고 정당하다며 업체 쪽의 처분취소 청구를 기각한 것이다. 세 가지 처분사유를 모두 인정했다. 사육시설이 너무 낡아 관계법령이 정한 기준에 부적합하고, 1만 마리를 사육하는 경우 수질오염총량제에 따른 오염 부하량이 초과된다는 사실이 충분히 인정되며, 농장이 ‘가축사
육 제한지역’에 들어서 있어 위법하고 환경오염 우려가 크다는 점을 현장검증을 통해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주민들의 싸움이 정당하다는 것을 공인 받았으니 무척 기쁜 일이다. 예상했던 대로 업체 쪽이 항소를 제기했으니 앞으로 2심, 3심으로 이어지겠지만 첫판을 이겼으니 일단은 주민들이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내친 김에 최종심까지 승소하면 깨끗하게 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그러나 주민들의 뜻은 그대로다. 완주군이 농장부지를 매입해 환경친화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주민과 업체가 상생하는 길이라는 점이다. 업체가 항소를 제기한 직후에 대중집회를 열어 부지매각을 촉구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완주군은 이미 업체가 손해를 보지 않는 적정한 가격으로 부지를 매각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모든 것은 업체 쪽에 달려 있다. 농장을 사들이고 곧장 재가동에 들어갈 셈이었는데 주민들의 반발과 완주군의 불허가로 6년 넘도록 묶였으니 불만이 크고 ‘영업손실’이라 여길 게다. 그러나 이는 1심 재판부도 밝혔듯이, 생태가치를 중시하는 시대정신과 이를 반영한 관계법령을 살피지 않고 덥석 농장을 사들인 경영진의 책임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이날 집회에서 한 참석자가 외친 구호가 모든 걸 말해주지 싶다. “늦기 전에 매각하여 본전이라도 챙겨가라!"


/차남호(비봉 염암마을에 사는 귀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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