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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찹고 편안한 상삼리 이발소 풍경2021-11-12

가찹고 편안한 상삼리 이발소 풍경


가찹고 편안한 상삼리 이발소 풍경

신창섭 이발사 이야기

 

용진읍 상삼리 전상삼마을에 간판 없는 이발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 나섰지만 마을 안에서 이발소가 있을 법한 건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예전에 이 마을이 용진면 소재지였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마을에 비해 규모가 제법 큰 용진초등학교를 제외하고 그 시절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을 안 고샅길에서 한참을 헤매다 작고 오래된 이층 슬라브 건물을 발견했다. 바깥에선 여기가 이발소라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이 어쩌면 이발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처음 느낌은 조금 낯설었다. 마침 동네 어르신이 머리를 자르러 오셨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오고 가는 사이 신창섭(70) 이발사의 가위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노년의 이발사와 오래된 단골손님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흑백사진처럼 평화롭고 정갈했다. 이 건물만큼 오래되어 보이는 이발 의자에 앉아 계시던 손님이 여기가 가찹고 이 사람이 동네 토박이고 그러니까 오는 거지. 이 사람 아버지한테도 머리를 잘라봤어.”라고 말하며 이곳의 만만치 않은 내력을 설명해 주셨다.

 


겁나게 오래되었네요.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 시작해서 견습생처럼 아버지 일 돕고 스무 살도 안되서 가위 잡기 시작했으니까 이발 인생도 50년이 넘었죠. 머리 감기는 일부터 시작했지요. 차차 면도도 하고 그러면서 가위를 잡은 거지요. 가난해서 배움도 못 마치고 어린 시절부터 이 일을 시작했지만, 그 시절은 다 그랬으니까 나는 당연히 부모님 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진안에서 이발소를 하셨어요. 6.25 때 피난 오면서 여기서 터 잡고 나도 여기서 태어난 거지요. 처음부터 이 자리에서 하셨던 건 아니고 용진면 여기저기서 하다가 여기에 자리를 잡았지.”

 

작은 마을 이발소의 내력

어르신은 자기 인생을 별 것 없어요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만이 쓸 수 있는 관용구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열두 살의 어린 소년이 학교를 그만두고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의 일을 돕고 그 일을 50년 넘게 어르신의 표현대로 겁나게 오랜 동안 해온 것은 결코 별 것 없는 인생이 아니다. 어르신은 아버지 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작은 이발소에 담긴 내력을 담담하게 들려주셨다.

 



도란스에 꽃아 사용하는 라디오와 드라이기. 기본적으로 30년은 넘은 물건들이다.


예전에는 용진면에 이발소가 열한 군데 있었어요. 이곳이 용진면 소재지였으니 늘 북적댔었지요. 여기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면 장사꾼들이야 뭐야 사람들로 길까지 꽉 찼으니까. 이 동네 저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큰 잔치였어요. 그런 풍경이 지금은 다 사라졌지. 그때는 학생 수도 천 명 넘을 때가 있었어요. 한참 때는 새벽부터 손님들이 줄 서서 기다렸어요. 명절 전에는 이발하고 포마드 바르고 드라이 하고 난리였지요. 새벽부터 밤 열두 시 넘어서 까지 머리를 깎았어요. 그럴 때는 동네 노는 젊은이를 일당 주고 보조로 썼어요. 그때가 한 삼십 년 전쯤 같아요. 나도 젊었고 동네 사람들도 젊고 사람도 참 많았지요.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부터 학교도 안 다니던 애들은 송판 위에 앉혀 놓고 머리 자르면 막 울고 그래요. 애들 머리 솔찬히 많이 잘랐지. 지금은 애들 머리 자르는 일은 끝났어요. 그때 머리 자르던 애들이 다 커서 가끔씩 찾아오기도 하고 그래요.”

이발소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가을 단풍으로 근사했다. 예전에는 초등학교 주변으로 아름드리 벚나무가 수십 주 있었고 정문 앞에는 거창하게 큰 플라타나스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 베어지고 더 어린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마을 안에 있는 작은 이발소지만 간판을 달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위_ 화단의 국화와 꽈리를 근사하게 장식해놓으셨다

아래_ 이발소 앞 화단에는 철마다 나무와 꽃이 함께 한다. 가을국화가 한창이다.


간판이 없는 건 어차피 단골손님들이 오니까요. 오래된 집이니까 다 여기 이발소가 있는 줄 알잖아요. 그래도 사업자 등록증에는 태안이발소라고 되어 있어요. 크게 편안하다는 뜻이겠지. 우리 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죠. 오는 손님들은 정해져 있어요. 데미실 텃골이라는 동네에서도 한 일곱 명이 꼭 이발하러 다니는데 하나는 몹쓸 병으로 세상 뜨고 하나는 아프고 지금은 다섯 명이 와요. 여기서 살다가 임실로 이사 간 사람이 있는데, 떠난 지가 20년이 되었어도 전주 들를 일 있으면 꼭 우리 집에 들렀다 가는 사람도 있어요. 보통 머리 한번 끊고 35일 좀 지나서 다시 와요. 올 시기가 되었는데 발길이 뜸하면 안부를 물어보지. 그러면 병으로 세상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들어요. 마음이 참 안 좋지. 요새는 하도 그런 일이 많아요. 칠순을 맞이하면서. 아이고. 이제 이 일도 얼마 안 남은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합시다

어르신의 이발소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볼수록 정겨웠다. 요즘 미용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계장치도 화려한 치장 도구도 없었지만, 가위와 빗 하나로 천천히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어르신의 손동작은 섬세하고 진지했다. 머리 감는 작은 욕조의 오래된 타일과 플라스틱 바가지도 소박하지만 여전히 쓸모 있어 보였다. 어르신은 예전처럼 손님이 많지 않은 요즘에는 농사일과 이발소 일을 함께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발소 문은 언제든 열려 있다고 한다.

 

계속 여기 매여 있으니까 취미 생활이나 세상 구경을 못 해봤어요. 오래된 절도 다니고 스님들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고 섬마을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싶은데 그런 걸 못해봐서 아쉬워요. 날만 새면 이발소 나오고 상추 농사일도 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어영부영 세월이 가서 칠십이 다 되어 버렸어. 이발소도 쉬는 날이 있지만, 이것만 해서 먹고 살 수 없으니 쉬는 날에는 농사를 지어요. 쌈채소 농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농사일은 주로 안사람이 하느라 욕보지요.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오니까 문을 닫아놓기가 곤란하지요. 꼭 돈을 벌려는 것 보다 는 고맙게 먼 길 찾아오는 손님들이니까요. 이발하면서 신문 사설도 읽고 책이나 좀 읽고 그런 걸 재미로 알지. 사람들 찾아오면 만나는 재미로 하는 거예요. 찾아오던 손님들이 자꾸 세상을 떠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일을 쉽게 놓지는 못하겠어요.”

 

가난하게 살다보니 붙들게 된 기술이 이제는 놓을 수 없는 애틋한 마음이 되었다. 젊은 손으로 가위질을 했고 힘 있는 까만 머리카락을 잘랐다. 신창섭씨는 까맣던 머리가 흰머리로 변해가는 과정을 함께 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가 많다. 이발소의 작은 의자에 앉아 나도 신창섭 어르신을 따라서 창밖을 고요하게 내다봤다. 이 창으로 사계절을 구경하셨을 게다. 어르신은 이발소 앞에 꽃과 나무를 심어 놓으셨다. 목화랑 조롱박도 심어 놓으셨는데 용진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해 심어 놓으셨단다. 목화로 실을 뽑고 조롱박으로 바가지를 만들던 시절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대를 이어 써 내려오던 작은 이발소안에는 미처 다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간간히 이발소를 찾는 흰머리 단골손님들에게 신창섭 어르신의 오래된 가윗 소리가 더 오래도록 들려지길 소망한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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