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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리 중국댁의 칠전팔기 인생2021-06-17

성재리 중국댁의 칠전팔기 인생


- 원오산 마을 전현숙씨 이야기

 

고산면 안수산 아래 성재리를 찾아간 늦봄, 그이의 텃밭은 벌써부터 풍성해지고 있었다. 상추와 쪽파는 먹기 좋게 자라 있었고, 고추와 오이 모종은 여름 햇살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마당에는 곧 논으로 들어갈 초록으로 빽빽한 모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현관문 앞 작은 정원에는 빨간 장미꽃이 만발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이를 중국댁이라고 부른다. 중국댁 전현숙씨(66)가 고산면 안수산 아래 성재리에 살기 시작한 것이 2007년부터니까 그새 14년이 흘렀다. 중국 연변 화룡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낼 때만 해도 완주에서의 삶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녀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도 몇 번이나 울었다. 국경과 사경을 넘나든 그녀의 삶은 언제나 꿈꾸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때때로 참기 힘든 고난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안수산 아래 전현숙씨의 집. 동네 할머니와 함께 농사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결혼 전에는 친정이 잘 살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화룡시의 시장이었어요. 아버지 손잡고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다 경례를 하며 지나갔던 기억이 나요. 59살 이른 나이에 뇌출혈로 돌아가셨죠. 아버지 돌아가시고 시골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한동네 결혼을 했어요. 막상 시집을 갔는데 우리 시어머니 때문에 참 힘들었어요. 시어머니 드센 성격 탓에 나까지 해서 며느리 다섯 명이랑 다 싸웠어요. 며느리들이 다 못 산다고 나가 살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넷째 며느리인 나랑 같이 살았죠. 내 성격이 참 화통해요. 그러니까 예전 시어머니가 나한테 못되게 그랬어도 세월이 흘러서 다 잊어버린 거지. 그 당시 아이아빠가 서른 살부터 아파서 누워있었어요. 17년을 누워있다 47살에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병원비와 아이의 학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정신없이 일을 해야 했다. 목재공장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유치원에서 우리 돈으로 한 달에 8만원을 받아가며 일을 시작했지만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망설임 없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장사를 시작했다. 공부를 잘 하던 아들 뒷바라지는 할 만 했지만 오랜 동안 병으로 누워있던 아이아빠는 고생한 보람도 없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반찬 장사를 시작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도라지를 칼로 쪼개고 물기를 쫙 짜서 고추장 양념을 한 반찬을 만들었어요. 그거를 봉지에 하나씩 포장에서 팔았어요. 이 반찬은 지금도 중국에서 유행하는 반찬이에요. 나 혼자 집에서 만들고 봉지에 넣어서 포장했어요. 그래도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하루 이천 개도 넘게 팔았어요. 마른 명태에다 고추장 양념 무친 것도 반찬으로 팔고. 유치원 선생님 할 때는 한 달에 오백 원 벌었는데 반찬 팔아서 삼천 원 벌었어요. 아들 학교 들어갈 때 되면 또 병원비로 목돈 들어갈 일이 생기고. 아들이 대학을 붙었는데 북경대 들어갈 점수였는데도 돈이 드니까 학비가 좀 적은 연변 고려대를 들어갔죠. 거기 있어도 못 살고 나가도 못 살 거면 나가서 돈이라도 벌 생각으로 내가 2001년에 한국으로 나왔고 우리 아저씨가 2002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아들도 한국 고려대로 옮겨서 한국으로 나오게 됐죠.”

 


읍내 일보러 다닐 때 늘 타고 다니는 자전거.


그녀는 서울 동대문 운동장 근처 신당동에 자리를 잡고 식당 배달 일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백반 여덟 상을 겹쳐서 머리에 이고 12시간 동안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녔고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야채곱창 볶는 일을 6년 반 동안이나 했다. 하루에 10만원 정도를 벌었고 한 평 정도 되는 고시원 쪽방을 같은 중국동포와 함께 살면서 아끼고 아껴서 6년 만에 1억을 모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녀의 전쟁 같은 노동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때는 동대문에서 비집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정말 사람이 많았어요. 백반 담은 쟁반을 머리 위로 8층까지 쌓고 배달을 다니는데 손이 안 닿잖아요. 보자기를 위로 감아서 쥐고 손에 쥔 전표 보면서 배달 할 곳 확인하고 그랬어요. 12시간을 그렇게 일하고 퇴근하면서 포장마차에서 한창 바쁜 시간에 야채곱창 볶는 일을 했어요. 정말 안 먹고 안 썼어요. 오백 원짜리 우유하나도 아까워서 안 사먹고 그랬어요. 고시원에는 다행히도 항시 쌀밥이 밥솥에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식당일 하고 퇴근할 때 김치 한 주먹 비닐봉지에 넣어 와서는 밥이랑 먹었었죠. 그렇게 살았어요.”

 



고된 노동과 각박한 생활은 결국 그녀를 병들게 했다. 먼저 그녀의 팔에 문제가 생겼다. 힘을 쓸 수 없이 아팠다. 일하던 식당에서 월급을 두 배로 올려준다고 해도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완주에서 농사짓던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완주살이가 시작됐다. 서울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았고 살기 위해 완주에 자리를 잡았고 서울에서 배운 기술로 읍내에 곱창집을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들이 일본말로 최고로 맛있다는 뜻으로 이찌방 곱창집이라는 이름도 지어줬는데 한 달쯤 일하다가 몸이 이상해서 병원을 갔더니 간암에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저녁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동안 살아온 세월이 생각나서 막 눈물이 쏟아졌어요. 나는 이때까지 참 착하게 산 거 같은데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왔나 그런 생각이 나서 밤새 울었어요. 그래도 다음날 훌훌 털고 일어나서 자전거를 타고 읍내 노래방을 갔어요. 나 노래 잘해요. 나 혼자 노래를 썩어지게 불렀어요. 그러니까 몸이 가벼워지더라고. 그때 내가 안 죽을 거란 확신이 들더라고요. 서울에서 더 이상 일 못하고 아팠을 때 그냥 고향인 연변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여기 완주로 와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한 번도 와 본적도 없는 완주를 그렇게 오게 된 거지요.”

 


1년 가까운 항암치료를 견뎌냈고 현숙씨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그사이 동네 사람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이는 씩씩했다. 공부 잘하고 착하던 아들은 박사학위도 받고 일본에 있는 게임회사에서 돈 잘 벌고 손자도 둘을 뒀다. 손재주 많고 눈썰미 좋은 중국댁 현숙씨는 연변에 살 때도 서울에 살 때도 지금 이곳 성재리에서도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어르신 할인을 몰라 비싼 핸드폰 요금제를 쓰는 분들을 위해 전화 한통으로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TV 리모콘을 잘못 조작해서 나오지 않는 TV를 다시 켜드리는 일은 그이의 몫이다. 일 년에 한 번 이십일씩 중국을 다녀오느라 마을을 비우면 어르신들이 중국댁을 찾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고 한다. 현숙씨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고산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컴퓨터수업 초창기 수강생이었던 그이는 동네한바퀴로 불린다. 늘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고 스스로 보조강사 역할을 하며 컴퓨터 앞에서 헤매는 어르신들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드리는 친절한 사람. 코로나로 인해 오랜 기간 휴강이었고 기다리던 컴퓨터 수업이 곧 시작 된다.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며 신사동 그 사람을 흥얼거린다면 그 사람이 바로 친절한 전현숙씨일 것이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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