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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고 살 수만 있다면, 글자를 사고 싶었지2021-04-12

돈 주고 살 수만 있다면, 글자를 사고 싶었지


돈 주고 살 수만 있다면, 글자를 사고 싶었지

- 완주 구이면 미치마을 김영애씨 이야기


시골 돌아다니며 만나는 어르신들에게는 무조건 할아버지 할머니하며 강아지 마냥 애교를 부리곤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일이 아니다. 연세를 여쭈면 대체로 나의 부모님 또래여서 놀랄 때가 많다. 나도 그 사이 마흔 번이 넘는 봄을 맞이했으니 솔찬히 나이를 든 것 이다. 김영애씨(1952년생) 처음 만나던 날도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가 툭 튀어 나왔다가 급히 자를 묵음처리하고 넉살 좋게 어머니로 바꾼다.

스무 살에 이 곳 미치마을로 시집와서 올해 일흔 번의 봄을 맞이했지만 영애씨는 아직도 마을에서는 제일 막내둥이, 농담 삼아 아가씨로도 불리 운다.

몇 년 전 남편 먼저 떠나가고 혼자 사는 집이지만 쓸쓸한 기운은 찾을 수 없다. 부지런히 가꾼 앞마당에는 진돗개 백호가 정신없이 뛰어놀고 집 둘레에는 노란 멜라초가 낮은 울타리마냥 둘러앉아 있다. 뒷밭으로 향하는 집 한쪽 벽에는 손 떼 묻은 농기구들이 걸려있다. 그 중에 낫과 호미가 제일 바쁜 모양이다. 연한 산나물이 한창 나오는 때이다. 요즘은 두릅 따서 시장에 내다 파는 재미가 좋다.

 

몸에 배었어. 이제 일을 그만해도 되는데 밭에 나가면 재미있어. 내가 노력하면 이것도 돈이 되니까. 그 돈으로 손주들 용돈주고 그런 게 재미있어. 밭은 나에게 고마운 곳이야. 나에게 효자고 놀이터야. 나물 뜯어서 남부시장 새벽 장에서 파는 재미가 좋아. 자식들도 처음에는 말리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인 줄 알고 그러려니 하고 좋아 혀.”







부지런히 가꾼 앞마당에는 진돗개 백호가 정신없이 뛰어놀고 영애씨는 요즘 나물뜯어 남부시장에 내다파는 재미에 빠졌다.


글로 가지 못해 더욱 생생한 말들

영애씨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자식들 키우기 버거워 다른 집에 수양딸로 보내지게 되었다. 글을 가르쳐준다고 믿고 보냈지만 일하느라 배울 틈이 없었다.

 

거의 식모살이를 했지. 13살 까지 그렇게 산 거 같아. 커서 배우려니까 힘들어. 창피한 줄은 아는데 글 배울 생각을 못 한 거여. 속에다 응어리만 쌓아놓고 그 마음 안 들키려고 도리어 더 큰소리 치고 까분 거지.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잘난 척하고, 몰라도 아는 척 했던 것이 지금은 후회가 되지. 그때 좀 창피한 거 참고 배울 걸. 어디 돈 벌러 가면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 친정집에서 한 동안 있다가 형편이 너무 안 좋으니까 17~18살 먹었을 때 또 식모살이를 했지. 우리 언니도 그러고 나도 그렇게 식모살이를 한 거야.”

 

영애씨의 말은 유난히 생생하다. 글로 풀지 못한 생각과 자연에 대한 묘사를 오롯이 말을 통해서만 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일까. 영애씨가 입으로 내는 바람소리, 물소리, 고생했던 시절의 한숨소리들은 눈을 감고 들으면 그때 그 시절 어느 틈에 슬며시 앉아 듣게 되는 소리마냥 생생하다.

 

스무 살 때 이 집으로 시집을 온 거야. 설 쇠고 보름 쇠고 스무여드레 날 왔어. 겁나게 추웠어. 눈 오고 아이고 참말로 웬 비가 그렇게 많이 왔는지 개울에 물이 넘쳐흐르니까 큰 바위가 떡떠글 떡떠글 궁글러 가는데, 열일곱살 먹은 우리 남동생이 나를 들쳐 업고 개울을 여덟 개를 건너서 왔어. 속옷까지 싹 다 젖었지. 남동생이 지금도 엄마를 공박한디야. 그때 누나 업고 그 산골 개울을 건너던 마음이 어쩠겄어. 누나를 이런 데로 시집보내는 마음이...”






올해부터 진달래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영애 씨의 노트


매운 시절도 언젠가는 연해지리라

모악산 남쪽 자락, 질마재 아랫마을로 시집온 영애씨는 몇 년 동안 이 곳이 전주 변두리 어디쯤이라 생각하며 살았다고 한다. 살다보니 완주 산골 중에서도 완전 산골짜기였던 것이다. 전기도 안 들어와 호롱불 켜고 살았고 번듯한 길과 다리가 생긴 것도 최근 일이다. 이렇게 산골짜기로 시집와서 사남매 낳아 건강하게 키웠으니 예쁨 받으며 살줄 알았지만 시집 올 때 건넜던 개울물처럼 살 아리게 맵던 시집살이였다.

 

첫 애가 참 예뻤어. 아들인데 쌍꺼풀진 큰 눈에 속눈썹이 어찌나 긴가, 성냥개비 세 개씩 올라가. 골짜기에 시집와서 이렇게 예쁜 아들을 첫 애로 낳았는데도 나를 예뻐해주기는 커녕 시어머니, 남편이 어찌나 구박을 했는가, 시집이라면 지긋지긋 혀. 우리 큰 딸이 자기들 이제 다 컸으니 우리 걱정 말고 엄마 인생 살라고 이제 집 나가라고 해도 끝까지 버티고 살았지."

 

답답한 마음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지금처럼 흔한 전화기도 없었고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라도 쓰고 싶었지만 글을 몰라 초등학교 다니던 옆집 꼬마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보내곤 했다. 언젠가는 아침에 하는 TV프로그램에 당당하게 출연하기도 했다. 매운 시집살이를 견뎌낸 이 시대의 며느리들이 출연해서 속풀이 하는 기획이었던 모양이다. 남편에게 구박받은 이야기를 세상에 털어놓으니 속이 시원하더란다. 주변에서 아는 체하는 사람도 생기고 참 똑똑하고 대담하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매섭던 세월들도 차츰 순해지기 마련이다.

 

영감이 몸이 아프다보니까 나에게 의지를 하더라고. 애아빠 돌아가시기 전부터 차근차근 정리를 했지. 그 동안 미안했다고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마음을 풀어주고 돌아가셨지.”

 

그래서 그런지 영애씨의 얼굴 어느 곳에도 누군가를 미워했던 흔적이 없다. 큰 딸의 권유로 43살 무렵부터 주부학교에서 한글공부를 시작했지만 농사일로 바쁘다보니 빠지는 날이 많았고 그러다보면 겨우 들어온 글자들이 재빠르게 도망가곤 했다. 올해는 한글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다 큰 딸 손잡고 완주 이서면의 진달래 학교에 입학했다.

 

돈 주고 살 수만 있다면 글자를 사고 싶어. 글을 알긴 하지만 뜨끔뜨끔 쓰지, 줄줄 읽고 쓰지는 못해. 한글교실 사람들은 마음이 잘 통해. 그 곳에서는 글 모르는 게 흉이 아니야. 우리 가슴에 든 멍을 우리는 서로 잘 알지.”

 

엉거쿠, 냉이, 싸랑부리, 보리뱅이, 담뱃대나물, 취나물, 고사리, 두릅, 챔빛나물, 고춧잎나물, 다래순, 삿갓나물, 횟침나물. 영애씨가 요즘 매일 산과 들로 나가 뜯고 만지는 것들이다. 글로 배운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전해 듣고 손으로 만져서 알게 된 것들이다.

이 나물들의 이름을 한글로 쓰고 싶다고 했다. 손주들에게 동화책도 읽어주고 싶고 집으로 날아온 고지서들도 막힘없이 읽어내려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아흔 넘은 친정어머니에게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말들을 편지로 전하고 싶다고 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기에 자주 보고 만져야 글자들이 영애씨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을 것이다. 악착같이 글을 배워본다고 하셨으니 올 가을 쯤 이면 영애씨의 편지를 받아 볼 수 있겠지.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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