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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운리 남쪽 망표마을] 열정봉사꾼 이애순 할머니2021-03-11

[황운리 남쪽 망표마을] 열정봉사꾼 이애순 할머니

 

부녀회장 30,

부당한 일은 못 참지

 

열려있는 대문 사이로 이애순(83) 할머니가 보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니 집 바로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안내한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잠시 쉼터로 이용되는 모양이다.

전주가 고향인 애순 할머니는 서울에서 화신백화점 안의 수혜점(혼수물품 판매점)을 운영하다가 망표마을로 시집오게 되었다. “내가 아주 멋쟁이였거든. 그러다보니까 시부모가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이를 이해할만한 사람하고 살아야 된다고. 우리 아저씨가 부모를 여의고 혼자였는데 그래서 결혼했지. 우리 아저씨는 처음 봤을 때도 인상이 참 좋았어.” 다시 살아도 남편이랑 살 거라는 말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군에서 어떤 교육을 받으러갔는데, 거기 선생님이 죽어도 남편하고 같이 살 사람 손들라고 했는데, 나만 들었어.(웃음) 나는 우리 아저씨랑 같이 살아야지.”

흔한 술과 담배로 속 썩이는 일 없었고 크게 싸우는 일조차 없었다. 부부는 오랫동안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그러나 지금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넓은 집에는 애순 할머니만 남았다.



할머니는 새마을사업과는 다른 개념으로 지역사회 개발이라는 일을 통해 마을에 지속적으로 봉사해왔다. 할머니는 이때가 봉사활동을 해온 시작점이라고 했다. 원래 망표마을은 냇가의 물을 떠다 식수로 사용했지만 지인을 통해 예수병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산 위에 간이상수도를 설치해서 지금도 그 물을 사용한다. “내가 일일이 다 전화를 돌리고 몇 번 찾아가기도 했어. 그래서 만들어 진거야. 우리 부락에 필요한 일이잖아.”

애순 할머니는 1972년부터 30년간 마을부녀회장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망표마을은 상망표와 하망표로 나뉘어져있는데 당시 상망표는 임씨, 하망표는 이씨 집성촌이었다. 상망표 아이들이 학교를 가려면 하망표를 지나야만 했는데 길을 못 지나가게 하는 등 작은 마찰이 있었다. “우리 애들이 자꾸 고생하니까 내가 (하망표)여자들하고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결심했지. 그래서 집에서 부고가 나면 쌀 한 가마씩 지급하는 쌀계, 삼베계를 만들었어. 그때 당시에만 해도 쌀 한 가마면 엄청 났어.” 이후에는 함께 여행도 다녀올 정도로 관계는 점차 호전되었다.



애순 할머니의 사진첩 속 젊은 시절 사진들.


지금은 화합도 잘 되고 좋지 뭐. 부녀회 임원들이 몇 십 년 전에 부산에서 물난리 났을 때 쌀을 걷어서 보내주기도 하고 헌 옷이랑 쓰레기도 일일이 분리해 팔아서 그걸 부녀회 자금으로도 썼지.”

할머니는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마을에서 부당한 일이 있다면 항상 앞장서서 해결했다. 마을 내 돼지 축사 설립을 반대하는 집회에 앞장서거나 부당하게 하망표까지만 길이 깔렸을 때에도 군에 항의하여 길을 깔았다. 할머니는 말을 하면서도 자랑할 게 아니라며 손사래 치셨다. “행정이 잘못하면 당연히 혼내야지. 알릴게 뭐 있나. 그냥 내가 이렇게 한 것만으로 됐어.”



애순 할머니가 복수초가 예쁘게 피었다며 마당으로 안내를 하는데, 집에서 꽃장식이 달린 까만 뜨개 모자를 쓰고 나오셨다. 잘 어울린다는 말에 쑥스러운 듯 미소만 머금는다.

요새는 심심하면 테레비 봤다가 저수지 있는 곳에 운동도 한 번씩 가고 그러지. 티비도 요새는 재미있는 게 없어. 코로나 때문에 회관도 닫고 해서 영 심심하잖아. 그나저나 복수초가 예쁘지? 난 꽃이라면 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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