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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동안 날마다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2020-09-15

60년 동안 날마다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

60년 동안 날마다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

삼례 일진사 세탁소 이낙교, 장인순 부부

 

20세기 들어 사람들의 삶을 바꾼 가장 중요한 발명으로 인터넷을 꼽는 사람도 있고 인공지능을 꼽는 사람도 있지만 세탁기의 발명을 그중 으뜸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는 세탁기야 말로 전 세계의 여성들을 날마다의 빨래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옷을 수선하고 다림질하고 깨끗하게 빨아서 입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들의 옷을 수선하고 다림질하고 세탁하는 그 고단하고 지난한 일을 60년 동안이나 이어오고 계신 삼례 일진사 세탁소의 이낙교(79), 장인순(80) 부부에게서 오래된 세탁소와 그 만큼이나 애틋한 순애보 이야기를 들었다.

 

세탁소 안의 풍경


재봉틀 옆에서 포즈를 취하는 이낙교 씨


어려웠던 시절 배운 세탁기술

이낙교씨의 고향은 소양 명덕리다. 어린 시절 6.25 전쟁을 겪었고 그 당시 시골마을의 풍경이 그랬듯 밤에는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왔고 낮에는 군인들이 돌아다녔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낙교씨의 아버지와 마을 남자분이 빨치산들에게 잡혀 산으로 끌려갔다가 어렵게 아버지만 살아 돌아오신 사건이 있었다. 불안해서 계속 마을에서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이낙교씨가 11살 무렵 온 가족이 삼례로 이주했던 이유다. 삼례에서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친구 분이 하시던 세탁소에서 세탁 일을 배우게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2년 정도 세탁일을 배우던 그 시절은 열여덟 살 소년에게 혹독하던 시절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때는 처음에 일 배우러 갔을 때 아침에 눈 뜨면 빨래야. 하루 종일. 2년 간 빨래를 빨았어. 세탁소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겨울에도 손 호호 불어가면서 손빨래를 한 거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그래도 일 배우는 곳에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니까 기분은 좋더라고.”

 

스무 살에는 일진사라는 멋진 간판을 걸고 자신의 세탁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전기, 기계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이낙교씨가 설명하는 그 당시 세탁소 풍경은 막노동의 현장이었다. 비좁은 가게에서 연탄화덕에 연탄불을 피워서 연탄가스를 마셔가며 일을 했다. 선풍기도 없는 더운 여름날의 세탁소 풍경을 잠시 생각해 본다.

 

연탄불 피워서 거기에다 무쇠 다리미 올려서 너무 뜨거우면 옷이 눌러 붙으니까 물에 식혀서 다리미질을 했지. 그때는 물분무기도 없었어. 그러니까 입에 물 머금고 뿜어가면서 다리미질을 했지. 어깨쭉지가 이렇게 올라갔었어. 다리미 하나 무게가 일킬로 오백이 나갔어. 그 놈 두 개를 들고 올렸다 내렸다, 연탄불에 달구니까 자루도 뜨겁지. 손에 지문이 싹 닳아져버렸어.”

 

80년대 초반에 전기다리미가 등장하면서 고된 일도 조금은 수월해졌고 삼례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던 일진사 세탁소는 1982년부터 현재 이곳에 터를 잡았다. 세탁소 천장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세탁된 옷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벽 한 쪽에 걸려 있는 가격표에는 정장, 콤비, 자켓, 코트, 브라우스, 와이셔츠, 잠바 등 품목에 따라 세탁비가 책정되어 있고 소매기장, 허리, 바지기장, 작크를 수선하는 비용도 매겨져 있다. 오래된 미싱 옆에는 그 만큼 오래되어 보이는 가위와 가지각색의 실들이 놓여 있다. 한참 일 많을 때는 오전에 와이셔츠 이삼십 장을 빨아서 다리기도 했다는 이낙교씨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던 부인 장인순씨는 남편의 굽은 어깨를 보는 것이 속상하다고 한다.

 

“60년을 이 세탁소 일만 한 사람을 곁에서 봤으니까 마음이 아파. 이 사람 일하는 노력에 비해 받는 돈이 너무 적어. 큰돈을 못 벌지. 이 주변에도 세탁소가 많았지만 큰 돈 못 버니까 오래하는 곳이 없지. 어쩌다 보니 이 사람만 이렇게 오래도록 하고 있는 거야. 평생을 여기다 바쳐 버린 거야. 지금도 못 하게 해. 고만 합시다. 편하게 살아요. 넘의 것 꼬장물 빼 준만큼 돈이 안 나와.”


왼쪽 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소녀가 장인순 씨다


멋쟁이 장인순 씨의 젊은  시절 사진


결혼하고 어렵게 태어난 아들과 함게 해변에서 찍은 가족사진


삼례에서 알아주는 로맨스

세탁소 이야기보다 더 흥미진진했던 건 두 분의 연애 이야기였다. 부부는 1961, 그러니까 60년 전에 처음 만났다. 그때 이낙교씨는 스무 살 장인순씨는 스물한 살이었다. 장인순씨는 일진사세탁소 근처 미용실에서 미용일을 배우고 있었다. 소문난 멋쟁이였던 터라 후레아 치마를 들고 가서 다림질을 맡긴 적이 있어 서로 안면이 있던 터였다. 동네 언니의 소개로 화산봉에서(현재의 우석대 정문 앞 나지막한 산)처음 만난 것이다. 그 당시 동네 젊은이들 만남의 장소였다는 화산봉에서 그저 앉아있었는데 달빛에 봤던 이낙교씨의 모습이 아주 그럴싸했다는 장인순씨의 말을 듣고 내가 괜시리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한 청년과 삼례에서 100마지기 농사를 짓던 부농 고명딸의 만남이 순탄하기는 어려웠다.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기차에 태워 강원도로 보내려는 오빠들의 작전이 성공하기 직전에 달리는 기차 안으로 이낙교씨가 뛰어 들어와 장인순씨를 껴안고 신발 한 짝을 벗어두고 뛰쳐나간 이야기, 그 길로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가고 삼례 영신학교(지금의 삼례중앙초) 근처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야기, 어려울 때 친정집에 찾아갔다가 문 밖에서 쫓겨난 이야기 등등 두 분의 사랑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레퍼토리로 가득했다. 양쪽 집안 어른들의 반대와 숱한 훼방에도 불구하고 둘은 10년 동안 만남을 이어갔고 결국 댓돌 위에 할머니만 서 계신 채로 쓸쓸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양쪽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식을 올렸으니 어려운 시련들도 스스로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세탁소 일만으로 생계가 어려워 수완 좋은 장인순씨는 밤새 기차를 타고 서울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소매를 해서 초등학교나 우체국, 병원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방문판매를 하며 돈을 모았다고 한다. 이낙교씨가 묵묵히 한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면 장인순씨는 영리한 책략가이자 어려움을 직시하고 돌파하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문득 일진사 세탁소라는 가게 이름의 내력이 궁금했다.

 

장인순 씨는 성경책 안에 남편의 청년시절 사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화산봉에서 달빛에 비췄던 이낙교 씨의 근사한 모습이 이랬을까


우리 가까운 친구들이 있는데 낙교가 세탁소를 차리는데 우리가 이름을 지워주자, 그래. 그 놈들이 일진사라고 이름을 지어왔어. 그게 뭔 뜻인고 하니 한 길로 나간다는 말이야. 달리 생각하면 매일매일 발전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고. 그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 거야.”

 

가게 이름처럼 60년 동안 한 길로 매일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살아온 두 분의 삶과 사랑이야기가 일진사 세탁소 곳곳에 담겨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있다. 세탁소가 가장 바쁘다는 환절기다. 다른 집에서는 못 지운 때를 자신이 말끔하게 지워서 손님한테 드릴 때 보람을 느낀다는 이들 부부의 세탁소는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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